아주 소소한 이야기들

춘설이 내린 토요일에는

by 폴초이


봄이 오는 길목에서 겨울이 시샘을 부린다. 눈과 비가 함께 내린다. 산에는 눈이 쌓이고 시내는 비가 눈을 녹인다.


꽃샘추위가 밤사이 대기를 얼어붙게 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방안이 서늘하다. 이젠 봄이라고 실내 온도를 낮춰 생활했었는데 간밤의 추위에 놀라 난방장치의 온도를 높였다.


우리 아파트 주차장 확보가 갈수록 험난해졌다. 저녁 8시가 넘으면 주차공간을 발견치 못하는 날이 많다. 엊저녁 퇴근하면서 주차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아파트 밖 이면 도로에 주차하고 말았다. 아침에 옮겨놓을 요량으로.


다음날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다가 이면 도로에 주차한 차를 생각해냈다. 생각해냈다기보다 주방 창문으로 보이는 차를 보고 문득 ' 내 차'를 옮겨야지 참, 하고 커피 내릴 준비를 멈추고 나갔다.


이면 도로에서 눈 비를 맞은 차는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앞 유리에 눈 비를 맞아 생긴 물 얼음이 축축하게 남았다. 와이퍼를 작동하자 도로로 떨어진다. 그만 흘러가거라.


내가 사는 아파트 동 뒤편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집으로 들어와 물을 끓였다. 커피를 내리고 향을 맡았다. 후각은 살아있고 미각을 살피기 위해 커피를 한 모금한다. 부드럽게 무겁지 않게 미뢰 세포를 자극한다. 쓴맛, 신맛, 단맛이 느껴진다.


방안에 들어와 책을 폈다. 작가 박솔뫼의 소설들만 7권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 있는 중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연속으로 읽으면 소설 속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단언할 수 있는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점심은 칼국수를 먹기로 했었다. 전날 저녁에 주꾸미 샤부샤부를 먹었다. 조선 육회에서 육회 600g을 포장해와서 막걸리도 곁들였다. 배민에서 조선 육회를 배달 주문하면 3만 원인데 포장하니 2만 5천 원이란다.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면 배달보다 포장이 증가할 것 같다. 배달비용이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과 맞먹다니 가성비를 생각한다면 포장이 우선이다.


전날 퇴근 무렵에 저녁은 주꾸미 샤부샤부라는 아내의 카톡 문자를 보고 육회 포장해 가려고 했다고 답장을 했다. 육회비빔밥을 먹기위해서 였다. 잠시 후 딸이 육회 포장도 추가하라네요란 재답신이 왔다. 직장에서 퇴근하면서 조선 육회 하계점에 주문을 넣었다. 포장된 육회를 픽업해서 집으로 가는 중에 딸이 막걸리는 샀다고 전화로 알린다.


육회와 주꾸미를 안주 삼아 딸이 사 온 느린 마을 막걸리 한 병을 마셨더니 배부름에 칼국수까지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제 남겨둔 주꾸미 먹물이 끓어올라 생면 칼국수를 넣었다.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가끔 집게로 저어주고 뭉치지 않게 면사리를 흩뜨린다.


난 면 요리를 좋아해 자주 먹는 편이다. 점심에 국수를 먹었어도 저녁에 또 먹을 수 있는 것이 국수 요리다. 밥맛이 없을 때도 찾아 먹는다. 전날 술로 인한 숙취해소를 위해서도 국수를 먹는다.


어릴 때부터 칼국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일 것이다.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어머니께선 방안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하얀 모조 전지를 깐다. 나무 도마에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놓고 나무 밀대로 둥글게 가장자리를 미는 것이다. 가장자리 두께가 얇아진 반죽을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나무 밀대로 감았다 폈다 하신다. 나무 밀대에 둥글게 말려진 반죽 피를 만두피 정도의 두께가 되도록 모조 전지 위로 펼쳤다가 밀대로 감았다가를 여러 번 하신다. 그러면 피자 도우처럼 큰 원형의 국수판이 완성된다.


국수판을 반으로 접으면 반달 모양이 된다. 반달 모양을 접고 접어 나무 도마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긴 직사각형 모양만 남기고 양 끝을 싹둑 자르면 두 개의 꽁다리가 생긴다. 어머니께선 일정한 두께로 썰어 칼국수 가락을 한쪽에 두시고 양 끝에 남은 꽁다리는 부엌 아궁이 불에 구워 주셨다. 그저 얇은 반죽 피를 불에 구워봐야 무슨 맛이 있을까 하지만 옛날엔 그 맛이 고소했었다. 칼국수를 미는 날이면 꽁다리 먹을 생각에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던 날이 기억저편에 떠오른다.


생면 칼국수를 보니 옛날 어머니께서 해주신 칼국수가 생각났다.


끓는 먹물 국물에서 아이보리색 칼국수가 춤을 춘다. 어떤 구성도 형식도 없이 열기를 느낀 그대로 막춤을 추는 것처럼. 면 한 가닥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려 익었는지 먹어본다. 조금 더 끓어 면발을 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입안에서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식도로 미끄럼 타고 내려가도록 말이다.


칼국수를 건져먹고도 국물이 남았다. 이번엔 찬밥을 죽으로 끓일 차례다. 밥과 김가루를 넣고 끓이다 계란 한 개를 터트려 붓는다. 남은 국물이 밥알을 불리고 자작해진다. 불을 끄고 죽을 떠 셋이 나눠먹었다.


밖에는 꽃샘추위와 더불어 봄비가 내린다. 방안은 칼국수의 훈김 덕분에 따스하고 뱃속은 뜨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