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초이네는 벼르고 별렀던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에 근 이 년간이나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지 못해 아내는 안달이 났다. 그러면서 제주도라도 가자고 졸라댔던 것이다. 초이네가 여행 자체를 다니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내는 비행기쯤은 타고 가는 여행이라야 참다운 여행이라는 생각이다. 집에서 떠나는 모든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초이와는 다른 것이다. 제주도는 비행기 타고 바다 건너가니까. 오래 살아도 안 되는 것은 안된다.
더군다나 초이가 지인들과 제주도를 다녀온 뒤로 아내는 밥 먹을 때마다 다그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린 언제 가요. 우리도 제주도 데려가요. 가족끼리도 가야죠. 자기만 놀러 다니지 말고요."
목소리 톤이 점점 빠르고 높아진다. 새해 들어 그런 닦달을 며칠간 듣고서야 초이는
"알겠어요. 2월에 갑시다. 이번 인사이동 끝나고요. 그래야 나도 짬을 내죠."답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초이는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28년간 공직에 몸담았지만 말단이라고 남들이 생각하는 직위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그리 나쁘게 돌지 않아 가까이 지내는 직장 선후배들이 꽤 있다. 술을 좋아하고 나름 책도 많이 읽고 있다.
언젠가 딸과 소주를 마시면서 나눴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딸이 말한다. "친구들이 너네 아빤 젊게 사는 것 같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랬더니. 어떤 계기가 있나 물어서 아마 책을 읽으면서부터 인 것 같아. 그랬지, 아빠도 그래?"
"그렇지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었었지. 네가 보기에도 좀 변한 것 같지 않냐?"
"응, 그런 것 같아"
초이는 또 재수 없는 놈 소리는 듣지 않고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단지 스스로만 그렇다. 사실 관운도 없긴 없었다. 관운은 관리로 출세하도록 타고난 복을 뜻하고 관재수는 관청으로부터 재앙을 받을 운수다. 공무원이면서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하면 관재수 없는 놈이 되는 건가. 그럼 고소 고발을 당하지 않을 놈이라는 게 되나. 재수 없는 놈은 좋은 소리가 되나. 에라이.
초이는 지난해 12월 초에 직장동료 다섯 명과 제주도를 다녀왔다. 동료들과 오래간만에 여행을 한 거였다. 2019년 봄에 중국 장가계를 끝으로 동료들과 여행하지 못했다가 인원 제한이 풀리자마자 다녀온 것이다. 직장동료들과의 모임도 여러 개다. 다섯, 여섯, 일곱, 열명 등 모임 인원도 다양하다. 그중에 모임이 겹치는 지인도 몇 명 있다. 성격이 원만한 스타일이지만 낯선 사람과는 친해지는데 시간이 다소 걸린다. 탐색전을 길게 가져가는 고지식한 면 때문이다.
드디어 초이네 가족끼리 제주도 여행을 떠나는 전날이 되었다. 기실 가족 전체는 아니다. 아들은 국방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남은 우리는 이렇게 여행을 다니는 것이다. 아들의 수고로움에 감사한다.
초이는 여행 떠나기 전날은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소개팅이라도 나가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정도다. 낯선 도시를 갈 때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냥 그곳의 공기를 들숨 하고 날숨 하기만 해도 새로워진다. 낯선 도시 속 어디를 가도 신기하고 이런 데가 있었구나 하고 놀란다.
그런 낯선 도시 속으로 파고드는 여행도 좋지만 익숙한 제주도는 언제라도 가면 좋다고 느껴지는 섬 도시이다. 제주도의 바람과 바다의 파도, 빛깔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짧은 일정으로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도 없는 섬이다.
초이가 처음 제주도를 갔을 때는 대학 3학년이었다. 군 제대 후 복학생 신분으로 후배들과 졸업여행을 명목으로 갔던 것이다. 졸업 1년 전에 학과생 대부분이 참여하게 되는 여행이다. 제주도를 갈 때는 목포에서 4시간 정도 소요되는 배를 타고 올 때는 비행 노선을 이용했다. 1989년 5월경에 제주도를 가게 되었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을 등반했던 일이다. 정상의 물 없는 백록담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었다.
성판악을 들머리로 관음사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군대 시절 100킬로미터 행군도 경험했던 터라 한라산 등산에서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 그런 등산은 에피소드가 전해오고 있었다. 코스가 길고 산행에 경험 없는 여학생들은 낙오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럴 때 남학생들이 손을 내밀어 함께 올라가게 되면 학과 커플로 성사될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3월에 복학해서 여행 전에 관심 두고 있는 여학생이 있다면 한라산 등산을 통해 잘만 하면 커플로 돌아오게 된다는, 복학 동기생끼리의 희망소원이었다.
난 어떻게 됐냐고? 한 여학생의 손을 잡고 올라갔지만 그 여학생은 졸업 전에 임신과 결혼을 해버렸다. 인연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 같이 갔었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왜 그때 그 여학생의 손을 잡았을까 다른 여학생의 손을 잡았다면 대학생활이 핑크빛으로 화사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니 운명인 거다. 지금의 와이프 만날 운명이라서. 그 여행에서 나랑 똑같이 커플 허사가 된 친구가 한마디로 정리한다.
이번엔 2박 3일 일정임을 감안하여 산방산 주변과 성산 일출봉을 돌아볼 계획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2015) [ 어쨌든 그때그때 눈앞의 모든 풍경에 나 자신을 몰입시키려 한다. 모든 것이 피부에 스며들게 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하루키의 말처럼 그곳에서 눈으로 얼마간 보고 있다가 주변의 풍경과 공기, 냄새를 맡다가 있고 싶은 시간 동안 있다가 떠날 때쯤 카메라를 들면 된다.
초이는 기내 반입용 트렁크를 열고 봄옷과 겨울옷 비율을 생각했다.
" 겨울옷도 넣어야겠죠" 거실에서 위탁용 트렁크에 짐을 싸고 있는 아내를 돌아보며 타전했다.
아내는 "당연하죠. 제주도도 바람 때문에 추워요. 롱 패딩 말고 잠바 정도만 챙겨요."
"네, 그렇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