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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편지

2021년 4월 17일

by 주원

오늘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점심시간이 지나도 비가 오는 것 같지 않기에 모자를 쓰고 집 밖으로 나섰습니다. 조금 걷고 싶었고, 나간 김에 아이스 라테도 한 잔 마시고 싶었거든요. 주방에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지만, 역시 커피는 남이 내려준 커피가 맛있지 않나요.


이곳에 이사 온 지 이제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났지만, 아직 이 동네를 잘 알지 못합니다. 평일엔 출근하고 퇴근하기 바빴고, 주말에는 항상 일이 있었거든요. 오전 6시 반에 일어나 1시간 일찍 출근을 해서 제 글을 조금 쓰고 업무를 하고, 퇴근을 하고 뭔가를 먹고 잠들었습니다. 피곤해서 정신이 없었는지 금요일 아침엔 접촉 사고를 냈고 (다행히 번호판에 부딪혀서 상대 차주가 그냥 넘어가 주셨어요) 퇴근할 무렵엔 명치가 뻐근한 게 느껴졌습니다. 일을 강요하는 회사도, 강도 높은 직무도 아닌데.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이번 주말에는 정말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동네를 산책할 시간이 생겼던 것이지요.


천천히 걸으며 골목골목 숨어있는 가게들과 벤치에 앉은 사람들, 등산 가방을 메고 부지런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임대 현수막이 붙어있는 가게들과 개업을 할 예정인지 공사 중인 건물들도 보았습니다. 라일락과 이름 모를 꽃들도 보았고요. 아직 4월이지만, 5월이 온 것처럼 세상이 푸르렀습니다. 초록색 이파리 뒤의 파란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마음속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럴 땐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는 뜻이고, 글이 쓰고 싶다는 때입니다. 최근에 저는 업무와 출판을 위한 글만 써왔지, 저를 위한 글은 쓰지 않았거든요.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편지를 받은 적도, 쓴 적도 오래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받는 사람은 없는 편지지만, 쓰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오래간만에 노트북을 열어 편지를 씁니다.


아이스 라테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한 주동안 돌보지 못한 집을 정리했습니다. 셔츠도 다렸습니다. 언제든 꺼내 입을 수 있도록. 셔츠만 다릴 생각이었는데, 원피스와 재킷도 모두 다리게 됐어요. 구겨진 옷들이 많았거든요. 크고 작은 주름이 스팀다리미에 희미해지는 것을 보며, 제 마음도 반듯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구겨져있던 것은 옷뿐만이 아니었나 봐요.


편지가 길어졌네요. 사실 오늘은 미세먼지 농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목이 칼칼하네요. 내일도 날이 좋으면 또 걸어보려고요. 저녁 맛있게 드시고, 푹 주무세요. 내일 또 편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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