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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꿈틀거리는 중이에요

by 주원

세계 평화를 시키는 세일러 문이 되는 상상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매년 새로운 꿈들을 꿨다. 장난감에 둘러싸인 문방구 사장님이 되고 싶었고, 피아니스트도 되고 싶었고, 만화가도 되고 싶었고, 동시통역사나 외교관도 되고 싶었고, 군인도 되고 싶었고, 록커도 되고 싶었고 심지어 대통령도 되고 싶었으며, 잡지 편집장도 되고 싶었다. 꿈을 이룬 상상 속의 내 모습은 세일러 문만큼이나 근사했다. 꿈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퐁퐁 솟아올랐고, 나는 내가 언제나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내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네 길은 이게 아니라는 듯이 종종 발을 걸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란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걸을 수 있었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강해지기는커녕 지쳐가기만 했다. 안 되는 것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배움을 마지막으로 꿈을 포기하고 다른 삶을 선택했다. 실패자가 된 나에게 남은 건 예전 같지 않은 몸뚱이와 많아진 겁뿐이었고, 지루한 매일만이 나를 반겼다.


그러나 거대한 꿈 하나가 사라지자, 그 아래에 깔려있던 작고 오랜 꿈들이 꿈틀대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사진이 담겨있는 앨범을 살펴보듯, 그 꿈들을 정성스레 열어보았다. 하나하나 즐거운 사연이 담겨 있었다. 어떤 꿈들은 해프닝이기도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간접적으로 이루어진 꿈도 있었고, 여전히 이루고 싶은 꿈도 있었다. 이렇게나 꿈이 많았던 아이 었는데, 왜 그동안 잊고 살았을까? 고작 한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패배자로 여겼다니. 먼지 쌓인 꿈들을 잘 닦아서 내 마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진열해두었다. 그저 먹고사는 일만이 내 삶의 전부인 것 같을 때, 내 삶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을 때, 나는 진열된 꿈들을 보며 삶의 이유를 기억하고 계속 살아갈 것이다.


어렸을 때에 비하면 겁도 많아졌고 체력은 나빠졌으며 시간은 없기에 예전처럼 꿈이 퐁퐁 솟아나는 건 아니겠으나, 다시금 매일이 설레는 삶을 살고 싶다. 쓸모와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저 하고 싶은 걸 즐기고 싶다고, 용기를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글을 쓰면서 듣고 싶었지만 망설이던 수업을 신청했고, ‘그걸 해서 뭐하겠어'라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일들을 찾아서 메모해두었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봐야지.


내 마지막 꿈은 노인정이나 실버타운에서 가장 힙한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솔직히 고대로 늙어도 충분히 인싸가 될 것 같긴 한데, 이것으로 만족할 순 없지.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여러 가지를 경험하며 재미있게 살고 싶다. 오랜만에 생긴 용기와 자신감이 금세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며, 한 번 꿈틀거려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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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명인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는 김승희 시인의 <꿈틀거리다>에서 가져온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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