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호주로 이민을 가서 가정을 꾸린 큰 외삼촌은 조카들에게 간간히 선물을 보내왔다. 커다란 소포 안에는 바비 인형, 체리 소다 파우더, 몰티져스, 가슴팍에 캥거루나 코알라, 하버 브릿지가 그려진 티셔츠, 알록달록한 냉장고 자석, 그리고 귀여운 아기 천사나 곰돌이 같은 것들이 그려진 카드가 들어있었다. 간간히 미키 마우스 인형이나 파버 카스텔 색연필, 만화 디지몬 시리즈에 나오는 디지바이저도 있었다. 삼촌이 보내준 선물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것은 빨간색 닌텐도 게임보이였는데 당시 빨간색 게임보이는 희귀템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져가면 회색 게임보이를 가진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보아라! 이것이 희귀한 빨간색 게임보이니라. 한 판 하고 싶다고? 그럼 줄 서!).
나는 내 물건을 아낀다. 초등학생 때 받은 파버 카스텔 색연필과 중학생 때 엄마가 사준 파나소닉 포터블 카세트 플레이어, 대학 친구가 강의 시간에 몰래 써준 쪽지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애지중지하는 편도 아닌데 가전제품도 내 손에 들어오면 (애초에 고장 난 것이 아닌 이상) 고장 없이 오래오래 썼다. 그렇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 갖고 놀았던 바비 인형들은 모두 목이 짧았다. 내가 그녀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덜 억울했을 텐데, 모두 타인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나와 아주 가까운 타인 때문에.
그 범인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내 여동생이다. 나와 달리 동생은 마이너스의 손이라서, 똑같이 사도 먼저 엉망이 됐다. 몇 번 입으면 옷이 금세 더러워진다거나, mp3 플레이어가 몇 달 만에 고장이 난다던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전자사전을 잃어버린다거나… 아무튼 그녀는 자기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인형이 엉망이 되면 내 인형에 손을 뻗었다. 내 인형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필사적으로 인형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고, 동생 역시 빼앗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형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뚝.
이 소리는 바비인형의 목과 머리가 분리되는 소리다.
머리가 분리된 바비인형을 확인한 동생은 인형에 흥미가 사라졌는지 머리를 놓고 방을 나가버렸고 나는 홀로 남아 멍하니 분리된 그녀를 바라본다. 머리와 몸을 다시 끼워보지만 예전의 적절한 비율을 구현할 수 없다. 이전보다 목이 짧아진 그녀들은 슬프게도 예전만큼의 애정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그것이 그녀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아아, 사랑이란 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바비 인형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때쯤, 나의 흥미를 잡아 끈 것은 미니카였다. 당시에 <우리는 챔피언>이라는 만화가 인기 있을 때였고, 주변의 남자 친구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교실 뒤편에 트랙을 깔아놓고 미니카 경주를 벌이곤 했다. 시끄러운 모터 소리는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들었고, 내 시선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미니카들이 갖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책은 사줘도 장난감은 사주지 않는 엄한 분이었기 때문에 미니카를 가질 수 없었다. 나 역시 뭘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가 아니기도 했고.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지나치는 문방구는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유리를 통해 일본어 문구가 적힌 미니카 박스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갖고 싶었지만 나는 박스가 햇볕에 바래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갖고 싶다고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아는 아이 었으니까. 대신 지금 가질 수 없는 걸 다 가질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문방구 주인이 되고 싶다고 삐뚤빼뚤하고 커다란 글씨로 어딘가에 적었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가진 장래희망이자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내 의지로 소비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을 땐, 문방구는 커녕 문구나 장난감에 관심이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내 의지로 펜이나 노트를 산 기억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연말이나 연초에 다이어리를 사지 않은 지도 몇 해 되었고. 그걸 사지 않아도 언제부터인가 집에 굴러다니는 것이 많아졌다. 굿즈가 만연하는 시대를 살기 때문일까. 받지 않으려고 해도 무언가는 항상 내 손에 남아 있었다.
대신 나의 ‘갖고 싶다'는 욕망은 물건이 아닌 사람과 행위로 뻗기 시작했다. 나보다 멋진 사람들을 동경하고 ‘나는 왜 저 사람이 될 수 없을까'를 고민하며 한때는 스스로를 심연으로 밀어 넣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람의 마음을 얻거나 목표를 쟁취했다. 모두 운과 체력이 좋은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운과 체력 모두 좋지 않고, 나의 괴로움은 갖고 싶으나 갖지 못한다는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도 알며, 모든 것을 다 갖고 살 수는 없다는 것도 아는 나이가 됐다. 요즘은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도 없을뿐더러.
‘만약’이라는 의문을 가지고 과거를 떠올리는 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가끔 생각해본다. 만약 내가 목이 짧지 않은 바비 인형만을 가졌고, 쉽게 미니카를 가질 수 있었다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 적당히 욕망하는 인간이 되었을까? 아니면 지금도 무언가를 갖기 위해 달리는 인간이 되었을까?
문방구 주인이 되는 꿈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꿈으로 금세 대체되었지만, 나는 나의 첫 번째 꿈을 여전히 좋아한다. 타인의 모습을 보고 꾼 꿈이 아니라 자의로 정한 꿈이니까. 문방구 주인을 시작으로 나의 꿈은 서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