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 살던 집에는 까맣고 오래된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엄마가 결혼하면서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서울서 제주까지 저 큰 피아노를 가져오다니 참 대단한 사랑이라고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는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노래도 잘했다. 그걸 뒷받침할 재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냥 그렇게 취미가 됐다. 그래서 피아노를 가지고 왔을까? 엄마가 피아노를 치면서 '어른이 돼도 피아노 한 두곡 정도는 칠 줄 알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좋아'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나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으며, 나의 첫 피아노 선생님이기도 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젓가락 행진곡이나 비엔나 행진곡 같은 걸 치곤 했다.
나의 첫 피아노 학원은 (대략 6살 정도로 기억한다) 엄마의 친정이 있는 서울 은평구 어딘가의 한음 피아노라는 곳이었다. 등록을 하니 가방과 책과 가로로 기다란 노트를 줬다. 선생님은 시범을 보여주고 노트에 과일 열 개를 그렸다. 한 번 칠 때마다 색연필로 과일을 색칠하라고 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동그라미에 태양 같은 걸 그리기에 이건 반지냐고 물었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귤'이라고 했다.
두 번째 피아노 학원은 제주도의 한 시골 동네에 있는 곳이었다. 그 동네에는 피아노 학원이 딱 두 개밖에 없었고(나머지 한 곳은 곧 사라져서 독점 영업장이 됐다) 원장님은 교회 장로였으며 원장님의 남편은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었기 때문에 피아노 학원이 동네에 미치는 파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안 다니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였고 시골 동네 피아노 학원 주제에 피아노가 10대 가까이 있었다. 거기서 바이엘의 나머지 부분을 뗐는데, 바이엘 하편의 남은 부분이 얇아졌을 때쯤에 <ㅇㅇ일보 피아노 콩쿠르>가 있어서 또래 여학생들과 출전하기로 했다. 연 하늘색 투피스를 입고 하얀색 스타킹을 신고 머리띠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잘 나가다가 머리가 살짝 새하얘지더니 연습할 땐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곳에서 틀려버렸다. 결국에 장려상밖에 못 받았다. 나보다 훨씬 못 쳤던 상급생은 의외로 무대 체질이었는지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나의 꿈은 문방구 주인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였는데, 피아니스트는 못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대회 운 같은 건 없고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인생을 살게 되리란 걸 얼핏 알게 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회를 자주 다녀서인지 귀가 좋은 편이라, 피아노 학원에서 들려오는 언니들의 연주를 듣고 집에 가서 그대로 칠 수도 있었지만(물론 쉬운 것만), 다른 친구들에 비해 진도가 느렸다. 초등학교 2학년일 때쯤, 겨우 바이엘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은 어른이 된 것처럼 기뻤다. 하농, 체르니 100, 부르크 밀러, 소나티네, 반주곡집 이렇게 다섯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와서 얼른 피아노 앞에 앉았다. 책을 펼치고 딩동 댕동 눌러보는데 밖에서 엄마와 아빠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이랑 피아노 학원비가 비싸다는 이야기였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책 5권의 값과 학원비를 감당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피아노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았고 또 부모님께 부담을 주기도 싫어서 몇 주 뒤에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왜냐는 말에 '그냥... 피아노가 재미 없어졌어'라고 대답했다.
초등학교 6학년일 무렵, 코를 찡하게 만드는 추위가 감돌던 11월인가 12월 어느 날에, 나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의 뒷 자석에 앉아 있었다. 잠에 들었다가 추워서 눈을 떴는데 하늘이 온통 분홍과 보라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침 차에서는 제목을 알 수 없는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한 순간이었고, 나는 곧 그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됐다. 어떤 곡인지 찾고 싶었지만, 엄마가 젊었을 적에 만든 믹스 테이프여서 곡 정보는 없고 ‘피아노 클래식 모음’이라는 글자만 쓰여있었다. 엄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고.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바로 음악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스마트폰도 없는 시절이었다. 애타는 마음은 일 년, 이 년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았지만 그 곡을 만난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차가운 공기, 핑크빛 노을, 바람에 날리는 억새들과 꿈결 같은 흐름.
시간은 흘러 흘러 중학생이 되었고 필요한 악보가 있어 어느 인터넷 카페에 찾아 들어갔다. 악보를 찾아보고 있는데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그 카페의 배경음악으로 내가 간절히 찾던 곡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곡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No. 1이라는 곡이었다. 나는 기적처럼 그 곡과 재회했고, 하려던 일은 잊고 그 악보를 구했다. 나는 정말 거의 매일 - 거짓말이 아니고 - 두 시간씩 피아노에 앉아서 연습을 했다. 피아노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음표를 하나하나 뜯고(?) MP3로 곡을 들으면서 연습을 했다. 나중에는 손이 아파서 파스까지 붙여가면서 연습을 했다(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열정이다. 지금은 그렇게 못 한다). 다행히 가족들은 내가 아침 7시부터 피아노를 쳐도 감미롭다고 하거나 옆에서 지휘하는 흉내를 낼 뿐, 시끄러우니 그만하라고 악담을 퍼붓진 않아주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그러나 뜨겁게 그 곡을 연습했다. 악보는 모두 외웠고, 피아니스트처럼 아주 완벽하게 치진 못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칠 수는 있다. 집에 있었던 까만색 피아노는 이제 야마하 디지털 피아노로 대체되었고, 피아니스트의 꿈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엄마가 어렸을 적에 해줬던 말처럼 한 두 곡 정도를 피아노로 칠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실감하고 있다. 이후에도 슈베르트나 쇼스타코비치 등 마음에 들어와 오래 남아있는 곡이 있지만, 딱히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없었다. 그 곡들이 상대적으로 별로이기 때문이 아니라, 드뷔시의 곡과 마주한 순간이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장 그르니에, 섬)”이었기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