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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커가 되고 싶었는데

by 주원

중학교 1학년 때쯤 신문에서 한 아티스트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소녀 록커가 음악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였던 것 같다. 섹시함을 강조하던 여성 아티스트 사이에서 헐렁한 청바지에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그녀, 에이브릴 라빈.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어렸을 적부터 팝 음악을 좋아해서 (집에 오면 항상 클래식 아니면 올드 팝송이 틀어져있었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마돈나의 음악을 즐겨 들었지만(웨스트라이프와 백스트리트 보이즈, 가레스 게이츠도 물론 좋아했고), 에이브릴 라빈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종류의 ‘쿨함'도 있다니! 스모키 화장 사이를 뚫고 나오는 그녀의 눈빛은 순진한 학생에게서 중2병을 끌어내기 충분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그녀의 1집 앨범 <Let Go>를 사는 것이었다. 내 책상 위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놓여있었기에 CD가 아니고 테이프를 샀다.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고 앨범 커버를 펼쳤다. 커버 사진들은 마치 에이브릴 라빈이 평소에 시간을 보내는 거리에서 대충 찍은 사진 같았고, 앨범 제목과 가사는 손글씨로 적혀있었는데 그것마저 멋지게 보였다. 아주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것이다(그렇지만 지금 봐도 꽤 멋있다). 나는 그녀의 데뷔 앨범을 듣고 또 듣고 테이프가 늘어져서 에이브릴 라빈의 목소리가 변조된 목소리처럼 들릴 때까지 들었다. 그녀가 직접 쓴, 가끔 철자를 알아보기 어려운, 가사들까지 모두 외웠고 그러는 과정에서 몰랐던 영어 단어들과 또 연음 법칙까지 자연스럽게 익혀버렸다. 2004년쯤엔 SBS에서 그녀의 내한 공연을 방영해준 적이 있었는데, 방송을 녹화까지 해가며 봤던 기억이 있다. 10대 소녀의 공연을 방영해줄 정도라니. 나 말고도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는 거겠지.




내가 살던 지역에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연합고사를 치렀어야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나 역시 연합고사 준비에 몰두했다. 고등학생이 되면 살던 곳을 떠나 홀로 다른 지역에 살아야만 했는데, 혼자 지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모르던 그때는 그저 그 갑갑한 시골을 어서 떠나고만 싶었다. 시골에서의 삶은 지겹기만 했고,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혼자 있을 때면 <Let Go>의 B면의 첫 번째 곡인 Tomorrow를 듣고 따라 부르며 내일은 다를 거라고, 여기가 아닌 그곳은 다를 거라고 주문을 걸듯이 소원을 빌었다. 문제집을 풀다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라면 그 모습이 지금 보기에도 아름다웠을 텐데, 안타깝게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빗자루로 기타 연주 시늉을 하며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언젠가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처럼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스케이트보드도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사이 나와 에이브릴 라빈의 음악 노선은 달라졌지만(왜 갑자기 아이돌스럽게 되어버린 거야?!)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스케이트보드도 타고 싶다는 마음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고 바로 과 동아리 중 하나였던 락밴드 동아리에 들어갔다. 기타는 칠 줄 몰랐고 노래도 잘한다는 자신이 없어서 일단 키보드로 들어가서 일 년 간 몇 번 공연에 참여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에 몇 번 동아리 부원들과 노래방엘 갔는데 어느샌가 우리 과에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 당시 군 복무 중이고 락밴드 동아리에 엄청난 애정을 갖고 있던 - K 선배는 휴가 중에 내 노래를 들으러 학교에 왔을 정도였다. 자세한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키보드 담당이었던 나는 2학년이 되었을 때 보컬이 되어 있었고, K 선배는 나보고 공연을 하자며 통기타 하나를 건네줬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나는 K 선배를 비롯한 몇 명의 선배들과 함께 나름 성공적으로 첫 무대를 마쳤다. 자우림의 ‘팬이야'라는 곡이었고, 나는 정말로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게 됐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공연을 했다.


스케이트보드는 그보다 한참 뒤에, 첫 공연 후로 약 6년이 지나서야 탔다. 정확히는 스케이트보드가 아니라 크루져 보드지만. 저녁을 먹고 운동장에서 크루져 보드를 연습하는 게 한 때의 낙이었다. 겁이 많고 또 속도감을 즐기는 편이 아니기에 그저 S자 커브를 그리며 굴러가는 것에 만족했다. 가끔 뒤로 벌러덩 넘어지기도 했는데, 그 정도는 금방 잊고 다시 도전할 수 있었지만, 한번 내리막길에서 대자로 넘어져 바지가 찢어지고 다리가 길게 쓸린 후로는 보드를 탈 수 없었다. 이제는 금방 낫는 나이도 아니었을뿐더러, 보드 위에 올라가면 넘어질 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더 이상 보드를 타지 않고 신발장 안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다. 핫 핑크색 보드를 볼 때마다 보드에서 넘어지고서 멋쩍게 웃거나 주먹으로 바닥을 한 대 치고 다시 보드 위에 오르던 나 자신을 추억할 테니까.


나는 요즘도 가끔 에이브릴 라빈의 1집을 듣는다. 이제는 그 노래를 들으며 에이브릴 라빈을 떠올리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노래를 또 듣던 나를, 더 큰 곳에서 미래를 꿈꾸던 나를, 언젠가 무대 위에 서길 마음속에서 조용히 꿈꾸던 나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런 꿈과 기억이 있어 참 다행이라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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