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히도 부모님께 좋은 하드웨어를 물려받아 태어났다. 어렸을 땐 좀 통통하긴 했지만 그에 비하면 순발력이 좋았고 체력도 좋았다. 무엇보다 또래가 자주 겪는, 발을 삐끗하거나 뼈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이 없어서 몸을 사리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는 수영 선수이기도 했고(나의 도내 대회 최고 성적은 아쉽게도 4위), 육상부 정도는 아니었지만 운동회 때 계주는 무조건 나갔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체육을 좋아해서 체력장은 모두 1등급을 받아야 직성이 풀렸고, 팔의 실핏줄이 터져서 작은 멍들이 팔을 뒤덮었을 때까지 배구공으로 패스 연습을 했다. 이렇게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과한 열정이 부담스러운 주인공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와다다다 거리며 시끄러운 캐릭터는 전혀 아니었다. ‘나는 왜 안 될까'라며 침울하게 앉아있다가 ‘한 번만 더'를 읊조리며 일어서는 편이었다. 될 때까지 하고 또 하는.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쯤에, 어딘가에서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본 적이 있다. 티비 프로그램이었는지, 실제로 본 것인지는 잘 기억나질 않지만 그중엔 여자 생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걸어가는 모습은 또 어린 소녀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도대체 왜 이렇게 불이 잘 붙는 거냐고?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내가 인간 불쏘시개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한 번도 날 말린 적이 없는 부모님은 이번엔 부채질까지 했다. ‘진해에 해군사관학교가 있다더라. 우리 주원이가 해사에 가면 벚꽃 구경은 자주 하겠네!’ 그 뒤로 종종 해군사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생도들이 입는 유니폼을 보며 그 유니폼을 입은 나 자신을 상상하곤 했다. 군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면서, 그저 공부 열심히 하고 운동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그 꿈은 중학교 2학년 때 완전히 ‘쫑'이 났다. 체육 시간에 50미터 달리기 수행평가가 있어서 전력으로 두 번 달렸고, 점심시간이 되어서 급식소에서 줄을 섰는데 갑자기 소리가 안 들리고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서있을 수 없어서 급식실 식탁에 엎드려 있었는데, 밥은 안 먹고 엎드려있는 학생이 의심스러웠던 한 선생님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가 놀래서 나를 부축해 교사 휴게실에 데려갔다. 선생님들이 손을 주물러주고 홍삼차를 타 준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다. 그때 나를 본 한 남학생은 내 얼굴이 너무 하얘서 귀신이 서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한 대 패주고 싶었지만 기운이 없어서 참았다.
이상하게 그 뒤로는 뛰고 나면 자주 어지럽고, 앞이 보이질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준비물을 두고 와서 살짝 뛰어서 다녀왔다가 조회 시간에 주저앉은 적도 몇 번 있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잘 모르겠다고 했고(빈혈인가 보다 싶었다) 점점 몸을 사리게 되었다. 해군사관학교고 뭐고 아예 운동을 포기했다. 뛰어다니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는데, 이젠 뛰는 게 무서워져 버렸다. 건강운을 10대 초반에 다 썼는지 그 뒤로 자잘하고 은은하게 아팠다. 30대가 되어서야 운동 후 어지럼증과 많은 문제들이 저혈압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의사는 내 혈압이 낮다며 무기력하지 않냐고 물어봤다. 저는 매일 무기력한데요…? 그게 혈압 때문이었다고요…?
29살이 되었을 때, 나는 그만 아프고 싶기도 했고 답답한 현실에 위축된 나 자신이 싫어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고민하다가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했다. 돈도 없었으면서 6개월 치를 끊었다. 첫 며칠은 어색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기구들은 복잡해 보이고, 웨이트 존에는 우락부락한 남성들만 득실거려서 끼기도 눈치 보이고, 내가 들 수 있는 건 고작 핑크색 아령뿐인 것 같고… 인파를 피하기 위해 아침에 운동을 나갔다. 몇 번 나가보니, 아침에 나오는 멤버는 거의 고정이었다. 그들은 수다를 떨거나 음식 프로그램을 보면서 유산소를 하지 않았고(!), 자기만의 루틴으로 운동을 했다. 운동을 마치면 출근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일터로 나서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어색한 마음과 추위를 뚫고 매일 아침 7시 반마다 피트니스 센터에 갔다.
데스크 직원이 날 보면 말없이 수건 두 장과 열쇠를 건네줄 때쯤, 일이 생겨 3일 정도 운동을 못 간 적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운동을 갔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처음 보는 아저씨가 날 보고 ‘왜 요새 운동을 안 나왔냐'라고 물어봤다. 그 얘기를 듣고 좀 놀랐는데, 첫 번째는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누군가가 봐주고 있다는 것이었고(누군가는 소름 끼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침 운동 멤버가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 것처럼 누군가도 나를 보며 무언가를 얻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맨몸으로 스쿼트 20개씩 3세트를 하는 것도 힘들어했던 나는, 40kg 바벨을 지고 스쿼트를 할 수 있을 만큼 근육이 자랐고, 마음 근육도 함께 자랐는지 막막한 시기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얻었다. 체력과 마음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PT를 받으며 운동 자세도 배웠고, 필라테스나 요가로 종목도 바꿔보면서 운동을 계속했다. 종종 지치거나 수렁에 빠지는 일도 있었지만 이겨냈다. 모두, 내 근육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때문에 1년 간 운동을 쉬고 걷기만 하다가 최근에 다시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50kg 바벨을 들고 데드리프트도 거뜬히 해낸 것 같은데, 근육이 다 사라졌는지 이제 내가 들 수 있는 건 또다시 핑크색 아령뿐이다. 위축된 건지, 그 사이 어깨가 말린 건지 거울 속 나는 초라해 보이기만 한다. 예전만큼 들지 못해 속상했지만, 곧 회복할 것을 알고 있다(물론 꽤 오래 걸리겠지만). 이 악물고 하나 더 들 때, 지난번보다 나는 자랄 것이고, 다음날 얻을 근육통에서 체력과 마음이 성장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나는 이제 덜 아프고 건강하게 살자는, 해군사관학교 생도가 되는 것만큼이나 거창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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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1년에 1~2번 운동하다 어지러울 때가 있는데, 스마트 워치를 보니까 심박수가 엄청 떨어지고 있더라고요. 앉아서 심호흡 크게 여러 번 하고, 신선한 공기도 좀 쐬고 하면 나아지긴 해요. 여전히 뛰는 건 무서워서 잘 안 하고, 컨디션에 맞춰서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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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근육이 잘 안 붙는 몸이고 한때 절 가르치던 트레이너의 말로는 제가 운동하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거래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