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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Nov 21. 2018

노잼인간

멀고도 먼 존잼인간이란 존재

어느 날, 회사의 콘텐츠 개발부 팀원들과 만날 일이 있었다. 회의도 하고,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다가, 어쩌다 내가 대학원생 때 겪은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옆에 계시던 디자이너 선생님이 내 포스트를 검색하여 글을 읽더니 큭큭하면서 웃었다. 나는 남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왜 그러시죠?’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아무도 대학원에 가려고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아무튼 재밌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나는 나의 불행을 재미있게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디자인 담당 선생님들이 나에게 자신들이 만든 클럽에 가입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매일 ‘뭐라도 하자’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클럽이란다. 선생님들은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저는 그림을 못 그리는데요,라고 하니 그림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보곤 글을 쓰라고 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일단 알겠다고 했는데, 그 뒤로 나에게 뭘 좋아하냐고 자꾸 묻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스타워즈 티셔츠를 입고 나에게 아따맘마나 주토피아나 포켓몬고 같은 이야기를 꺼내며 (아무래도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이니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좋아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스타워즈와 아따맘마를 본 적도 없고 (아, 그 핑크색 옷 입는다고 떼쓰는 애요? 라고 하니 그건 아따아따라고 했다.), 주토피아나 포켓몬고는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으며, 무언가를 그렇게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여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호기심과 웃음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취향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는 노잼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의 대화가 자꾸 뒤에서 내 발을 밟았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나. 생각의 끈을 잡고 걷다 보니 그 끝에 대학원의 기억이 걸려있었다. 개인의 취향과 욕망을 접고 연구에만 몰두해야 했던 날들이었다. 어떤 웹툰을 재밌게 보았는데, 책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얘기를 꺼냈다가, 교수님께 웹툰 볼 시간도 있냐는 소리도 들었었다. 주말에 뮤지컬을 보다 인터미션 시간에 핸드폰을 켰는데, 연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냐는 교수님의 메시지에 마음이 급해 제대로 2부를 보지 못한 적도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수님은 노래 경연 프로그램은 다 챙겨 보는 분이었다. 교수님, 그럴 시간이...?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매달 받는 인건비는 넉넉지 않아, 취향보다 가성비가 우선이었다. 좋아하는 것이어도, 돈이 많이 드는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됐다. 어렸을 적 나는 좋아하는 게 무척이나 많았던 것 같은데, 대학원에서의 오 년이라는 시간은 노잼인간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나 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대학원생이 아니다. 모두가 그동안의 노력이 아깝지 않느냐는 말을 했지만, 나는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라는 애매한 상태에서 내 행복을 찾아 대학원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직장인이 된 나는 이제 나의 취향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차근히 마음속 어디엔가 꽁꽁 숨겨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보았다. 면 요리, 그중에서도 아무 양념도 넣지 않은 평양냉면과 베트남 쌀국수, 신맛이 나지 않는 커피, 영화 <러브레터>와 <아멜리에>, 드니 빌뇌브의 영화들, 검정치마와 오아시스와 라나 델 레이와 플로렌스 앤 더 머신과 파라모어의 음악들, 황정은 작가의 소설들, 쌍꺼풀이 없고 긴 눈을 가진 남자들, 그리고 개구리 커밋. 확실히 깨달은 건 이 목록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이 꽤 많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난주, 또 디자이너 선생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선생님 한 분이 또 질문을 건넸다.

‘마틸다 씨는 어떤 신발 브랜드를 좋아하세요?’

  신발 취향이라니. 이건 이십구 년 간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다. 대답을 잘 했더라면 이 글의 결말이 통쾌했을 테지만, 당황하면 뇌가 멈춰버리는 사람이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 나이키요?'따위의 대답을 하고 말았다 ('선생님은요?'하고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닥터마틴을 좋아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더욱 울적해졌다.).선생님은 그 이후로도 ‘여기가 끝인 줄 알았지?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라는 듯,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들을 퍼부었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고마웠다. 이런 질문들을 받지 않았더라면 나에 대해 생각해 볼 일도,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또 나와 많이 다른 그들 덕분에 모르던 세계에 발을 담굴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 그들과 더 오래 만나보면 나도 좋아하는 것이 많고,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런 것 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찾아보고, 해보면서 나의 경계를 넓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내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도 괜찮으니까. 다음번에 그들을 만난다면, 반드시 나의 취향을 제대로 대답해주리라. 존잼인간, 얼마 남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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