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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Dec 17. 2018

다음 예약 곡: 보헤미안 랩소디

누가 저 곡을 노래방에서 불러?

  대학원생일 때, 교수님은 가끔 회식 자리에서 기분이 좋거나 술을 많이 마실 때면 3차로 노래방을 외치시곤 했다. 그러나 우리 연구실 사람들은 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마이크를 안 잡으려고 어떻게든 기를 썼다. 그중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선배도 있긴 했는데, 안타깝게도 노래를 더럽게 못해서 무한도전 가요제에 나오는 신나는 곡들을 슬프게 부르는 재주가 있었다. 이 분위기 좀 어떻게 띄워볼까 싶어 막내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는데 부를 수 있는 최신곡이 원더걸스의 '텔미'라며 곡번호를 누르는 모습을 보고 이 친구가 정말 20대 중반이 맞나 싶었지만 어쨌든 추억의 곡으로 인해 분위기는 조금 달궈졌다. 다음 곡 예약자는 연구실에서 가장 조용한 선배였는데 김연우의 슬픈 발라드들을 예약함으로써 텔미로 억지로 달궈놓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교수님의 심기가 어떤지 살피고 있는 나의 동공도 같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교수님은 술이 취하시면 모르는 노래도 같이 따라 부르는 취미가 있어서 발라드도 거의 듀엣곡처럼 무사히 넘어갔다. 이제 노래방 잔여 시간은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고, 우리는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해야 하나 난처한 얼굴로 노래방 선곡표를 뒤적거리고 있는 찰나, 새로운 곡이 시작되었다. 티브이 화면을 흘끗 쳐다본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큰 글씨로 써져있는 그 제목은 바로 Bohemian Rhapsody. 맞다. 그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노래방에서 팝송? 그리고 저 곡이 몇 분 짜리인 줄 아냐고, 누가 저런 곡을 노래방에서 부르냐고. 완전 민폐라고 구시렁대던 찰나에 교수님이 마이크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헙. 누가 이 선곡에 대해 불평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날 밤, 다 같이 '마마- 우우우우'를 외쳤다. 내가 대학원에 있었던 5년 간, 한 세네 번쯤 노래방에 갔었는데 항상 마지막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불렀다. 나중에는 그 곡이 나오면 '아 이제 끝날 때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더 신이 나서 양손을 위로 뻗어 음악에 맞춰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그 후 대학원을 나왔고 교수님의 목소리도 희미해지던 찰나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했다. 퀸의 노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몇 곡 들어 알고 있는데 (또래가 듣지 않는 팝송을 찾아 듣는 것이 중, 고등학생 때의 괴랄한 취미였다) 굳이 봐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개봉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열기가 식지 않는 것을 보고 일요일 오전에 영화관을 찾았다. 보는 사람이 많이 줄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아직도 영화관 좌석의 2/3 이상이 차 있었다. 이후에 일정이 있어 여운이 채 식기 전에 급하게 영화관을 나서야 했지만 하루 종일 멜로디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노래를 들으며 내적 댄스를 추다가 집에 와서야 참고 있던 흥을 터뜨렸다. 영화에 나왔던 곡들을 찾아 가사를 보며 따라 불렀다. 이 방에서는 호응하는 관객도 없고 나를 찍는 카메라도 없지만, 내가 곧 프레디 머큐리였고, 로저 테일러였고, 브라이언 메이였으며, 존 디콘이었다.


  참 웃기지. 교수님이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른다고 마음속으로 눈을 흘기던 내가 지금 보헤미안 랩소디를 찾아 듣고 부르고 있다니. 유행은 돌고 돈 다 긴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15년 전에 발매한 곡을 어른들과 함께 듣고 부르며 이야기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오래간만에 '보헤미안 랩소디 봤어요?'라며 사람들과 대화할 거리가 생기기도 했고, 퀸의 음악 덕분에 멀게만 느껴졌던 어른들과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다. 나이도 다르고, 음악을 들은 시기도 다르고, 또 음악을 들으며 떠올리는 추억도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퀸의 음악은 멀리 떨어져 있던 개개인과 세대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마치 다른 패턴의 천들을 이어 만든 거대하고 아름다운 조각보 같은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말이다. 또 퀸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평범하게 중간만큼만 하라는 이 세상에서 지금의 너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멈추지 말라고 외치는 응원이자 사회에게 나를 억압하지 말라고 외치는 구호처럼 들린다. 이 영화를 본 이들이 많다는 건 단순히 음악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응원가가 필요한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올해의 마지막 해가 질 때까지, 아니 내년이 되어서도 당분간은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퀸의 곡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모임자리에서도 퀸의 이야기로 테이블이 조용할 날이 없겠지. 아, 교수님이 노래방에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르던 그때가 떠오른다. 지금이라면 왠지 교수님과 술 한 잔 하며 퀸의 노래에 대해 논하고, 또 어깨동무를 하고 퀸의 명곡들을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런 날이 또 오려나? 그때는 내가 먼저 보헤미안 랩소디를 예약해둬야겠다.



사담 1. 영화보기 전에는 내 최애 곡이 Under pressure였는데 (사실 난 보위를 더 좋아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최애 곡은 Radio Gaga가 됐다. 영화에서 Another One Bites The Dust에선 도입부의 베이스라인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저음을 충분히 표현해내지 못하는 내 블루투스 이어폰이 야속할 정도.


사담 2. 퀸도 퀸이지만 사실 나는 Blur, Oasis, Charlatans UK와 같은 브릿팝을 제일 좋아한다. 올해도 나는 갤러거 형제의 재결합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브릿팝 영화도 꼭 만들어주세요!!!!!!


* 커버 사진 출처: https://youtu.be/fcSLXxFXerg (이분의 영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덧. 보헤미안 랩소디 노래방 번호로 검색해서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아 제가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TJ - 7745

금영-8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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