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
https://brunch.co.kr/@matilda-lee/188
카센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기계는 금방 찾을 수 있었죠. 문제는 타이어에 얼마만큼의 바람을 넣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하는 것이 익숙한 세대인 저는 검색창에 '포터 타이어 공기압'을 검색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영숙이 이모의 남편인 덕양이 삼촌이었죠. 전화를 받은 삼촌은 어떻게 해보라는 말 대신, 근처에 있으니 카센터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타이어에 바람만 넣어주고 집으로 갈 줄 알았던 덕양이 삼촌은 몇 시간 뒤, 자신의 트럭에 단호박을 담은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 완승이 아저씨의 단호박 세척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의 딱한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이죠! 처음 본 세척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컨베이어 벨트와 비슷한 경사로에 호박을 쏟으면, 호박은 물과 함께 브러시가 돌아가는 통로를 지나갑니다. 이후 작은 접시에 호박이 하나씩 올라가고, 호박 무게에 따라 선별되어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나오지요. 귤과 콜라비도 이 기계로 세척한답니다. 이런 편한 기계가 있는데 이제껏 손으로 닦고 있었다니! 분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닦아야 할 호박이 산더미니 화는 나중에 내기로 합니다.
단호박은 기계가 닦아주지만, 그걸 다시 콘테나에 옮기고 지게차로 들어 차에 싣는 건 사람이 해야 합니다. 손으로 직접 닦는 것보다야 훨씬 쉬웠지만, 비닐하우스 안이라 땀이 흐르긴커녕 몸 전체가 땀으로 젖어있는 채로 일을 했지요. 그래도 두 시간 만에 가져간 단호박을 모두 세척했습니다. 농촌일수록 기계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세척기는 그렇다 쳐도, 지게차는 꼭 사야겠더라고요. 아니, 부모님은 이런 것도 없이 어떻게 일을 했대요?
단호박 세척은 하루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날의 두 배가 넘는 양이 아직 남아있었거든요. 이번에도 영숙이 이모와 덕양이 삼촌이 아침부터 나와 우리를 도와줬습니다. 세척장에 있는 동안 모르는 동네 아저씨가 수박을 썰어오기도 하고, 세척장의 주인 내외분은 물과 이온 음료를 갖다 주기도 했어요. 저는 요즘도 '하느님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 분들이 곧 하느님'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삼 백개가 넘는 컨테이너에 담긴 호박을 씻을 수 있겠어요? 이것도 이렇게 힘든데 이 천 개 넘는 컨테이너 분량의 호박 농사를 지은 분은 도대체 뭔지. 나중에 비법을 물어봐야겠습니다.
어렵사리 세척해서 후숙까지 마친 호박은 농협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또 한 번 선별을 하지요. 썩은 것, 너무 큰 것, 너무 작은 것, 너무 못 생긴(?) 것을 골라내고 박스에 담아 대형 트럭에 실립니다. 여러분들이 홈쇼핑에서 구매한 제주 단호박은 이런 과정을 거쳐 여러분들의 집 앞에 배송되는 것이지요. 물론 농부가 직접 판매하는 것도 있습니다. 저희 가족도 수확한 단호박의 일부는 직접 손으로 닦고 하나하나 말려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했답니다. 부모님이 농협으로 보낸 호박의 양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되지만, 고작 몇 달 전까지 월급을 받던 처지에서 누군가를 설득해 물건을 팔았다는 걸 대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영숙이 이모를 비롯한 이 동네 농부들은 자기가 키운 농산물은 잘 먹지 않는대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한 달 내내 호박밭에 굴러보니 왜 안 먹는지 알겠더라고요. 해 먹는 것도 지치고, 작물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습니다(하지만 단호박은 꾸준히 먹었습니다. 맛이 어떤지 봐야 하니까요). 책임감 부족이 아니라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증거였지요. 저희 가족뿐만 아니라 이곳 농부들의 7월은 온통 단호박이었습니다. 부디 맛있게 드시고, 긴 여름 건강히 보내시길 바라요.
https://www.instagram.com/ddhn.fami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