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난히 보약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부모님이 어렸을때부터 보약을 먹이기도 했고 싫어하긴 커녕 넙죽넙죽 잘만 먹었다.
그리고 몸에도 잘 맞는 편이었다.
기가 허해지거나 유달리 피곤하면 20대 중후반까지도 간혹 부모님께 보약을 얻어먹은 딸이다.
거기다 플러스 알파로 홍삼을 먹으면서 자란 아이다.
그런 나지만 결혼 이후에는 더 이상 염치없이 부모님에게 보약을 얻어먹을 순 없다.
그나마 보약이 되어준게 홍상수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하거나 약해질 무렵 홍상수의 신작이 개봉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제목이 길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말하니>
광화문 시네큐브에 1시간 걸려 도착해서 또 대략 1시간을 기다려서 3시에 영화를 보고왔다.
이번 영화는 최고중의 최고다.
모든 대사가 절절하게 와닿는다.
주인공은 시인이다. 여자친구 부모님을 만나서 낮부터 막걸리를 먹고 여자친구의 언니를 만나 보리밥도 먹고 유명한 절도 둘러본다. 저녁에는 여자친구 엄마가 만들어준 백숙에 와인을 마신다. 그러다가 위스키도 받아먹는다. 영화를 보다보면 절로 술이 땡긴다. 항상 그렇다.
주인공은 시를 쓰지만 시를 업으로 한다고 말하기엔 애매하다.
본인이 딱 쓸만큼만 돈을 버는데 그건 결혼식장 영상 제작 일로 버는 돈이다.
따라서 시인 즉, 업으로서 시를 쓰는 건 아니다.
주인공이 여자친구 언니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아버지가 뒤에 있잖아요."라고 하는 대사에 분노하면서 취한 모습을 보이고 나서 그대로 여자친구에게 끌려가서 잠든다.
그 사이 부모님은 둘이서 계속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당연히 이야기의 중심 소재는 남자친구다.
공교롭게도 여자친구 엄마의 직업이 시인이다.
그녀가 보기에 딸의 남자친구는 시인으로 성공하긴 어려워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삶의 고민은 '아버지와의 관계'라고 말하며 시인이 되기위해선 수많은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그 지혜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한다.
모든 대사 하나하나가 와닿는다.
이미 기록용으로 영상으로 유튜브 채널에 올려두었다.
내 지도교수님은 홍상수의 옛날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나는 옛날 초기 영화보다 후기에 접어든 영화를 좋아한다.
최근 수유천도 영화관에서 보고 나서 또 돈을 내고 핸드폰으로 봤을 정도다.
물 위에서도 흐린 장면으로 쭉 이어가는 촬영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탑, 당신 얼굴 앞에서 등등.
인상적인 영화가 매우 많다.
이번 영화에 김민희는 등장하지 않았고 불륜에 대한 내용도 없다.
그저 시를 쓰는 남자가 여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여자친구의 언니로 나오는 사람도 유난스러운 캐릭터다.
굉장히 똑똑한 첫째딸이라 부모님이 기대가 컸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딸이다.
3개 국어를 하는 그녀는 집에서 가야금에 푹 빠져 지낸다. 그런 사람인데 유달리 동생의 남자친구에게 표독스럽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말끝마다 "넌 그래도 뒤에 잘난 네 아버지가 있잖아."라는 말을 한다.
단어와 표현, 구절만 달라질 뿐이다.
사실 틀린말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