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해서 김밥을 만들었다.
아니다. 김밥 공장을 돌렸다.
집에 나 말고 김밥을 먹을 사람은 단 한사람, 남편밖에 없는데 하루종일 김밥을 만들었다.
오후 내내 밥에 간을 하고 속 재료를 볶고 김밥을 말았다. 밥이 모자르면 다시 또 그 공정을 반복한다.
가끔은 생각을 멈추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가장 효과적인 것이 단순 노동이다.
김밥 만드는 것이 나에겐 일종의 단순 노동이다.
속 재료는 보통 후라이팬에 볶으면 되고 보통 간은 소금으로 한다.
이번 김밥은 야채로는 딱 하나, 시금치만 들어갔다.
시금치는 반드시 끓는 물에 데쳐야만 독성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그 독성 물질의 이름은 까먹었다.
참치김밥은 한번도 자진해서 먹어본 적이 없는 나인데,
남편과 살다보니 참치캔을 자주 먹게 됐다.
남편은 김밥집에서 항상 참치김밥만 주문하길래 오늘 처음으로 참치김밥도 만들었다.
나는 단무지를 안 먹는다. 보통 김밥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단무지를 빼달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단무지, 오이는 내가 안 먹는 음식이라 김밥에서 제외된다.
너무 무료하고 심심해서 김밥공장을 돌렸다.
회사에 있을땐 답답하고 스트레스받고 마찬가지로 심심하고 무료하다. 대신 돈을 번다.
하지만 교통비가 나가고 스트레스로 인한 병원비가 나간다. 플러스만큼 마이너스도 반드시 있다.
집에 있으면 그냥 무료하고 심심하다. 약간의 불안감도 있지만, 사무실에 있을때보단 덜하다.
플러스도 없고 마이너스도 그리 크지 않다.
회사를 안 나가면 블라인드 앱도 안 쳐다보게 된다.
딱히 그 앱을 좋아서 쳐다봤다기 보단, 정말 할게 없는데 사무실에 종일 묶여있을때 어쩔수없이 봤던 것 같다.
항상 올라오는 글이라곤 여자/남자 이야기, 연애 이야기, 회사 이야기, 연봉 이야기가 다다.
하루종일 더 그레이트라는 러시아 궁정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틀어놓는다.
나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드라마의 이야기는 딱히 나를 매료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질때마다 다시 나는 그레이 아나토미로 돌아간다.
장갑 낀 손이 사람의 몸 속 장기를 헤집어놓는다. 항상 bp가 떨어지면 모두 소리를 지르고 이내 환자는 죽거나 괜찮아진다. 매화마다 반복되는 구조다.
9월부터 11월까지 교수님을 줄기차게 찾아뵜었다.
한번은 사무실에서 세어보기까지 했는데 지난학기에만 대략 7~8번 찾아뵌듯 하다.
그랬는데 12월 둘째주 경부터는 아예 연락을 안한다.
새해 인사는 해야만하기 때문에 한 것일뿐 더 이상 그의 인정을 갈구하기를 멈췄다.
25년도가 특히 힘들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나와 같은 학부 인문대 출신이란 이유로 선택한 지도교수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떼쓰는 애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박사 1년 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야한다는 룰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나를 채찍질하듯이 지도교수님을 만나뵙고 주제를 정하고 논문을 쓰고 너무 거지같다는 소리를 한바탕 듣고 학교 수업이 끝나고 김밥 봉다리를 들고 길에서 울면서 통화하는 나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김밥을 한동안 멀리했다. 약 한두달 정도인가.
그렇게 자기학대 수준의 과정을 반복했는데 12월 초에 논문은 게재불가였고 얼렁뚱땅 이직한 곳은 1월 초에 퇴사한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곤 참기름 냄새가 한 가득인 김밥 산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