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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Mar 15. 2022

정리

새해를 맞아 집안을 정리하고 가구 배치도 바꿨다. 마음 같아서는 분기별로 대청소와 가구 재배치를 하며 필요없는 물건들을 다 버리고 싶지만 정리는 커녕, 쓸모가 있건 없건 일단 집에 가져와 쌓아둬야 하는 남편의 성격 때문에 몰래 물건을 버리는 정도의 청소는 해도 가구를 옮기는 대형 공사는 못한다. 신혼 때부터 버리는 문제와 정리하는 문제로 무수히 싸웠건만 두 사람 모두 성격이 바뀌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나는 계속 말없이 물건을 버리고 남편은 뜬금없이 생각난 물건이 안보이면 또 몰래 버렸나보다 체념하며 서로 기분은 나쁠지언정 다툼은 피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가는 중이다.


새해여서인지, 아니면 아내의 눈물겨운 애교가 안쓰러워서인지, 이번에는 남편이 대청소와 정리에 동의해주었다. 그냥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흔쾌히, 기분 좋게, 힘쓰는 건 다 들어주고 옮겨주고 치워줄테니 원하는대로 집안을 바꿔보란다. 덕분에 주말 이틀에 걸쳐 우리집은 환골탈퇴하였고 그 뒤로 집에 오는 사람마다 거실이 훨씬 넓어졌다, 안방이 아늑해 보인다며 극찬을 했다.


그동안 내가 가장 많이 써오던 작은방으로 거실의 피아노를 옮기고 침대도 놓아 더욱 완벽한 나의 아지트로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 공간의 아늑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요즘은 방문을 열면 어김없이 남편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 채 영화 감상 중이다. 그리도 좋아하는 티비와 음향 시스템이 있는 안방은 놔두고 좁은 침대에 누워 패드로 영화를 보며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간다. 나는 아지트를 빼앗겼지만 어쨌든 이번 집안 정리의 결과는 남편도 만족도가 높은 듯 해서 다행이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터넷과 공유기와 지니와 기가지니의 복잡한 메커니즘이 가구 재배치 때문에 바뀌었다고 한다. 대체 티비가 방으로 들어가고 피아노 때문에 컴퓨터가 움직인 것이 와이파이와 지니에게 뭘 어쨌다는 말인지. 내가 이런 쪽으로 점점 더 뇌가 둔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차피 맥가이버 남편이 다 알아서 해결할 거라 신경을 쓰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흥, 나도 밖에 나가면 똑똑하다는 말 좀 듣는 사람이라구 항변해 보지만 이 남자의 머리, 특히 잔머리는 당할 수가 없다.


남편은 워낙에 뚝딱뚝딱 고치는 걸 좋아해서 이 집에 이사오며 베란다 확장 공사와 리모델링을 할 때 공사하시는 분들이 이런 것까지 사장님이 다 하시면 우리는 뭘로 먹고 사냐며 놀라셨었다. 대학 때 방학이면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냥 힘쓰고 알바비만 벌기에는 본인의 시간이 아까워서 뭐 하나라도 나중에 써먹을만할 걸 배우자는 일념으로 전기 기사님을 졸졸 따라다녔다더니 전기도 곧잘 만진다. 무슨 일을 하든 단순한 호구지책이 아닌 월급 받으며 공부까지 하자는 생각으로 일하는 직장관은 나와 비슷하다.


IT 회사에 다니고 있어 컴퓨터와 신종 기기 쪽으로는 날고 기는 직원들이 수두룩하지만 20대 젊은 직원들도 남편에게 놀란단다. 진정한 얼리 아답터인 것이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모니터가 두개 딸린 데스크 탑과 노트북 3대와 갤럭시 탭 3개와 아이패드와 무수한 핸드폰들이 있다. 게다가 각종 공구에 전선까지.

이렇게 쓰고 보니 남편 자랑만 엄청 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제발 물건 좀 버려.








내가 물건 좀 버리라고 잔소리 할 때마다 남편의 반박에 근거가 되는 내 물건들 중에는 보드게임이 있다. 부피로 따진다면 노트북 3대와 갤럭시 탭 3개에 비할바가 아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흔해졌고 초등학교에도 보드게임 시간이 있지만 십 몇년 전만 해도 보드게임 카페에나 가야 플레이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나는 미국에서부터 보드게임을 좋아해서 하나 둘 모으다가 아이들이 크면서 주말 저녁마다 가족이 모여 보드게임을 하는 가풍(?)이 생기자 더욱 본격적으로 게임을 사들였다.


이번에 대청소를 하면서 이제는 아들들에게도 시시해진 유아용 게임 등을 대폭 정리하고 남은 분량이 저정도다. 사실, 사진에 나온 만큼의 분량이 또 있긴 한데 연령대가 좀 높은 고난도 게임들이라 아들들이 더 크면 하려고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꽁꽁 묻어둔 상태다.









몸살나기 일보직전까지 가구를 옮기고 쓸고 닦고 정리하고 분리수거했던 이틀이 지났고 그 뒤 또 이틀 정도를 피곤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 겨우겨우 출퇴근을 했다. 퇴근하고 샤워한 뒤 고단한 몸을 내 아지트인 작은방 매트리스 위에 풀썩 내던지는 기쁨을 뭘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침대 옆 내 피아노에 이상한 것이 붙어있다. 이건 또 뭔가. 내가 말없이 남편 몰래 물건을 버리듯 남편은 말없이 나 몰래 뭔가를 설치하곤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일상이긴 하지만 남편은 생전 건드릴 일이 없어 아무 상관도 없는 피아노에는 또 무슨 짓을 한거람.


하루에 한번은 깨뜨리고 잃어버리고 넘어지고 다치는 사고를 꼭 쳐서 일일일사 (事)라는 별명까지 생긴 아내가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날 때 피아노 모서리에 이마라도 찧을까봐 걱정되서 붙혔다며 남편은 본인의 사려깊음에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이다. 웃어야하나 울어야하나. 반짝반짝 유려한 자태를 자랑하던 내 피아노에 스폰지라니.


그러나 물건은 물건일 뿐, 이번에는 아내의 이마를 소중히 여겨준 남편의 마음 씀씀이를 받아주는 것이 현명할 듯 하다. 어차피 결혼할 때 했던 약속 지킬거쟎아. 그랜드 피아노 사준다는 약속. 그렇지? 내가 이말을 할 때마다 남편은 말한다. 그랜드 피아노 그까짓거 지금 당장이라도 사 줄 수 있는데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갈 만한 평수의 아파트가 없는게 문제라고.


집안 정리, 물건 정리, 가구 정리 뿐만이 아니라 자존심 싸움으로 점철된 신혼 시절과 전쟁같던 출산, 육아 시절을 거쳐 이제는 서로의 성향과 습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부부사이의 암묵적인 타협도 이렇게 정리가 된다.




#폴로하스 #Polohath #긍사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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