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이 심한 친가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나와 외가 쪽 입맛에 더 가까운 여동생은 좋아하는 음식, 먹을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에서도 차이가 나지만 요리 솜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평생 단 한 번도 김치를 담가본 적이 없고 해 볼 생각도 없다가 운 좋게도 대장금 버금가는 요리 솜씨의 시어머님을 만나 최상의 김치를 무상으로 먹고 있는 나와 달리 동생은 미국에서 고등학생일 때 이미 스스로 김치를 담갔다. 친정 엄마도 김장을 안 하셔서 보고 배울 기회가 없었고 인터넷이 보급된 시절도 아니었다. 미국에서 김장 재료 구하기도 어려웠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내게는 아직도 불가사의다. 동생은 살림도 잘하고 깔끔하다. 병적인 청결은 외가와 친가 양쪽 모두의 공통점이다. 모두 손이 빠르고 부지런하다. 나만 돌연변이다. 청결과 정리에 관한 기준이 상당히 높다 보니 집안에서는 늘 덤벙대는 허당 취급을 받으면서도 밖에 나가면 손이 빠르고 정리 잘한다는 말을 들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아들들을 데리고 마트에 갔다.연근 판매대에서 시식 중인 연근 튀김을 내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두 녀석이 하나씩 집어먹고는 맛있다고 난리다.이때다 하고 직원분이 열심히 영업하신다. 두 개나 먹은 것이 미안해서 상품을 보여달라고 했다.
허걱 그냥 생연근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난 조리되어 있지 않은 생연근을 태어나서 처음 봤다. 이때까지 연근은 조림으로 반찬 가게에서 사다 먹는 건 줄만 알았던 나에게 생연근을 튀김으로 탄생시키라고? 죄송하다며 뒤로 물러서는데 두 녀석이 또 시식을 홀랑 집어먹어버렸다.
한 집에서 시식용 샘플을 네 개씩이나 먹다니 큰일 났다.
안 돼! 그럼 죄송해서 사야 한단 말이야!라고 외쳤으나 늦었다. 아들들은 맛있다며 순식간에 먹어버렸고 직원분은 다급한 나의 외침을 사겠다는 말로 확정 지으며 연근을 내밀었다. 양해를 구하고 시식대 뒤에 있는 반죽 사진을 찍었더니 친절하게 배합 비율도 알려주셨다.
집에 와서 배운 대로 연근 튀김을 만들었다. 맛있었다. 뿌듯했다. 그런데 아들들이 안 먹겠단다. 왜 마트 거랑 맛이 다르냐고 묻는다. 좌절이다.
김치 명인 어머님께서 겉절이를 보내주셨다. 신혼 때 어머님의 겉절이에 인터넷 뒤져가며 만든 보쌈으로 남편에게 극찬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한번 더 만들어 주었다. 역시 인터넷이 알려준 대로 했을 뿐 난 맛도 한번 보지 않았다.사실, 난 태어나서 이때까지 수육, 보쌈, 족발 같은 음식을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삶은 고기, 찐 고기, 물에 빠진 고기를 못 먹는 아빠 쪽 식성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차피 맛을 봐도 이게 잘된 건지 안된 건지 분간도 못했을 것이다. 손맛, 입맛, 요리 솜씨와는 무관한 매뉴얼로만 승부했다. 이번에도 남편의 평가는 대만족이었고 좋아하는 보쌈에 반주까지 하더니 기분이 업되서는 아들들에게 오늘자 일기 쓰기도 면제해주고 루미큐브 게임도 함께 해주고 용돈까지 주었다. 만든 사람은 난데.
내 요리에 만족하는 남편이 고맙지만 정말 딱 요리뿐이다. 요리 전후 상황은 나와 상극이다. 남편은 정리 정돈이 안 되는 사람이다. 본인이 요리하고 난 흔적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심지어 내가 한 요리를 먹기만 한 날도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개만 꺼냈다가 다시 넣었을 뿐인데 냉장고를 엉망으로 만든다. 역시 집안 내력이다. 처음 예비 시댁에 인사 갔던 날, 말 그대로 까무러칠 뻔했다. 심지어 나를 맞이하려고 청소하고 정리까지 한 상태라는 것에 더 놀랐었다. 부엌 상태는 더 충격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시댁에 가면 웬만해서는 부엌 쪽에 가지 않는다. 어머님이 주시는 반찬과 김치는 각양각색의 그릇에 담겨 온다. 그중에는 뚜껑이 잘 안 맞아 냉장고 안에 음식 냄새가 나게 만드는 것들도 종종 있다. 뚜껑이 잘 맞는데도 제대로 닫지 않고 넣는 일도 다반사다. 김치통 외부에 양념이 묻어있는 경우는 애교다. 게다가 뭐든지 사이즈가 크다. 반찬이 한번 오면 냉장고가 꽉 차고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내부 조명이 가려지는 바람에 어두워진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 진다.
그래서 반찬을 받으면 우선 우리 집 그릇으로 모두 옮겨 담는다. 김치를 받을 때도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분이다. 양이 얼마이든 간에 예외는 없다. 모두 소분해서 밀폐용기에 넣는다. 먹을 때마다 냉장고 속 반찬통이 하나씩 줄어들며 공간이 넓어지는 것을 보는 기분은 무척 상쾌하다. 시댁에 가면 웬만해서는 냉장고를 안 열어보는 것으로 정신 건강을 챙기고 있다. 남편은 불만이다. 김치 포기를 그렇게 잘라서 보관하면 맛이 없어진단다. 나는 근거를 대라며 반박한다. 작게 잘라놓으면 양념이 더 잘 밸 거라고 주장한다. 그럼 처음부터 잘라서 쉽게 하지 뭐하러 포기김치를 담그겠냐고 남편이 다시 따진다. 우리 친정은 물론 우리 집에 놀러 온 지인들에게까지 소문이 나서 김장철만 되면 맛이라도 보게 한 포기만 얻을 수 없겠냐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어머님의 위대한 김치가 요리에 무지한 아내에 의해 도착하자마자 집게와 가위로 난도질당한다는 사실이 남편에게는 충격인가 보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가위질을 해서 소분해놓아도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이구동성 김치 맛을 칭찬한다. 그래서 난 내 이론도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저절로 타협점이 생겼다. 김치를 받으면 처음에는 큰 통 그대로 보관하다가 익은 후에 전량 소분하는 걸로. 매번 인터넷 검색해서 얼추 흉내나 내는 아내의 요리를 맛있다고 칭찬해주는 착한 남편이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는 음식이 어머님의 김치이니 김치가 익는 며칠 동안의 답답함쯤은 내가 참아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머님께 감사드리는 마음도 함께 담아서.
오늘 보쌈 먹으며 남편이 김치도 많이 먹은 김에 살짝 반칙을 해봤다. 아직 다 익지 않았지만 남은 김치를 모두 작은 용기에 소분했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남편은 보쌈을 먹었고 난 김치통을 치워버렸으니 윈윈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집안에서 자란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때로는 내 뜻대로 되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그러나 Sometime you win, sometimes you lose가 아닌 sometimes you win, sometimes you learn의 마음이라면 소소한 논쟁마저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