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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Dec 23. 2020

시인의 밥상 - 공지영

일조량과 홀몬의 변화, 체온 유지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대부분의 인간은 겨울철에 평균 2~3kg의 체중 증가를 경험한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변화를 매년 느꼈고 간혹 그런 변화가 뚜렷이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해를 맞을 때면 “겨울철에는 살을 좀 찌워주는 게 예의이지” 하며 마음 놓고 다양한 디저트를 탐닉했다. 송년회, 신년회 등을 빙자한  각종 술 마시기 행사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

2년 전 겨울은 살이 찌기는커녕, 살이 빠진 첫 번째 겨울이었고 심지어는 20대 때 이후 도달해본 적이 없는 최저 몸무게까지 체중이 내려가는 바람에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면 어지러워 휘청거린 이상한 겨울이었다. 그러던 중, 생각보다 따뜻했던 날씨 덕분인지 봄마저 일찍 와버렸다. 대부분의 인간이 입맛을 잃는다는 그 봄 말이다.


워낙 술과 육식을 즐기지 않는 집안 내력이 있고 남자로서는 드물게 젊은 시절부터 빈혈에 시달리신 아빠를 닮은 체질인지라 갑자기 심해진 어지럼증에 덜컥 겁이 났다. 항상 먹고 싶은 것이 많아 걱정이던 내가 반대로 어떡하면 입맛을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이라니.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시인의 밥상. 지리산 땅값을 대책 없이 올려버렸다는 공지영의 산문집 지리산 행복학교의 후속 편이다.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내가 건강식을 좋아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사실 나는 식생활이 상당히 불규칙한 사람이다. 아침은 거의 항상 거르고 점심 저녁도 일정한 시간이 아닌 아무 때나, 배고플 때, 생각날 때 가장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대충 먹는 습관, 게다가 블랙커피는 하루에 기본 5잔 이상을 물처럼 마신다.


육식을 즐기지 않는 이유는 건강 때문이라기보다는 특유의 고기 냄새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 삶거나 찌거나 탕에 들어간 고기는 못 먹는 대신 불에 구운 고기는 먹는 편이다. 고기 냄새가 없어질 때까지 바싹 태워 물질이라는 탄소 덩어리로 덮어 씌운 다음에야 말이다.


육식을 즐기지 않는 만큼 탄수화물과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 책에 소개된 버들치 시인의 요리는 캐비어와 푸아그라와 트러플을 기본으로 장착한 최고급 코스 요리보다 더 탐나는 진수성찬 그 자체였고 시인의 요리 중 내 눈길과 식욕을 단번에 사로잡은 두 가지는 굴 누룽지와 보리 굴비였다.




탄수화물 중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쌀, 밀가루, 당분을 좋아하는 내가 그냥 누룽지도 아닌 굴 누룽지라는데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굴, 전복, 조개, 가재 등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외강내유형(?) 해산물을 특히 좋아하며, 어느 식당을 가서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먹더라도 밥이 맛있지 않으면 한 공기를 다 비우지 못하는 까다로운 밥 취향을 가졌기에 시인의 굴 누룽지를 직접 먹어볼 수 없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음식은 맛보다 식감으로 먹는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잘 지은 밥, 적당히 눌은 누룽지, 알덴테로 삶아진 국수 가락은 나에게 최고의 음식이다. 생선도 식감이 중요하다. 구웠을 때 기름기가 좌악 빠지고 살이 푸석푸석해서 부서지는 생선은 재미도, 맛도 없다. 연어, 참치, 가자미, 갈치 같은 생선들이 그 종류다. 구웠을 때도 살의 식감이 탱탱하고 식으면 약간은 꾸덕한 생선들, 고등어, 조기, 임연수, 삼치 등을 사랑한다. 그중 최고봉은 역시 굴비가 아닐까.

우습게도 물에 만 밥과 보리 굴비를 처음 먹어본 것이 불과 6-7년 전이다. 점심시간에 사촌 오빠를 만나러 여의도에 갔을 때 오빠가 사주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탱글탱글한 밥알과 쫄깃한 보리 굴비의 조합에 놀라고 기쁘고 신났던 기억이 있다. 그 맛에 다른 보리 굴비 전문 식당도 가보았다가 실망만 하고 돌아왔다. 물에 만 밥과 꾸덕한 생선 한 마리지만 제대로 맛을 내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음식인 것이다.




나는 밥알을 일일이 셀 수 있을 정도로 되게 지은 밥을 좋아한다. 그 밥에 찬물을 말고 짭조름하면서 쫄깃한 보리 굴비 조각을 얹어 한입에 입에 넣는 순간 느껴지는 세밀한 식감과 바다의 향은 분명 사치이다. 매우 행복한 사치.

시인의 밥상에 나온 음식 중 내가 싫어하거나 먹지 못하는 음식은 없었지만 (아마도 버들치 시인 역시 육식을 싫어하기 때문인 듯하다) 굴을 품은 누룽지와 법성포 출신인 시인의 누이가 직접 운영한다는 식당의 보리 굴비는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생각나고 또 생각나고 꼭 먹지 않으면 속병이 걸리 것 같은 갈망까지 불러일으켰다.

지리산 행복 학교 이후 정말 다짜고짜 지리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아주 독특하게 경우 없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가 보다.

이렇게 버들치 시인의 손맛에 대해 독자들을 실컷 약 올린 이 책의 후반부에는 뜻밖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단식이다.





쨍! 하고 나를 정신 차리게 하는 무언가가 머릿속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나의 분노와 슬픔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 것. 음식은 약이지만 독이기도 하다.

굴 누룽지를 먹으러 지리산 버들치 시인을 찾아갈 수도 없고 설령 찾아간들 일부 경우 없는 사람들처럼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무턱대고 밥을 달라고 드러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다행히 시인의 누이가 한다는 보리 굴비 식당은 서울에 있다고 하니  꼭 가서 버들치 시인을 닮은 손맛을 느껴봐야겠다.


먹는 사람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되는 것이 음식임을 기억하고 매번 숟가락질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깊은 맛의 향연을 마음껏 즐길 것이다.








덧붙임 말

: 이 글을 쓴 뒤 버들치 시인의 누이가 한다는 식당을 찾아보았는데 이미 몇 년 전에 그만두셨다고 한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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