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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글씨가 고픈 날

악필로 탄생한 글감이어라

by 바스락

악필도 이런 악필이 없다. 손은 마음보다 빨리 움직이고 덕분에 무슨 글을 썼는지 모를 때가 있다. 요즘 필사를 통해 또박또박 바른 글씨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눈을 따라 손에 힘이 들어간 걸 느끼는 순간 속도에 날개를 달고 일취월장 악필을 휘날린다. 언제나 불 꺼진 침대 위에서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지만 자야 한다는 강박에 눈을 질끈 감고 생각 회로를 수동으로 전환한다. 눈 뜨면 잠들기 전 솟았던 생각들은 지우개 너머로 건너간 다음이다. 가끔은 머리맡 메모장에 키워드만 몇 자 적어두고 잠이 든다. 아침에 확인한 메모장의 짧은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 무슨 내용을 쓰려했는지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설상가상 메모장에는 외계어가 쓰여 있을 때도 있다.


아들 문제집 채점 후 빨간 볼펜으로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엄마, 글씨 못 알아보겠어."

어이쿠 이런 또 휘갈긴 악필이 탄생했군, 아들 미안.


악필은 아들이 고스란히 닮았다. 첫 문장은 또박또박 쓰는가 했더니 휘리릭~ 종이 위에서 날갯짓한다.

"엄마 이렇게 써야 멋있는 글씨지?" 나쁜 건 빨리 배우는 습자지 같은 아들, 엄마가 미안해~


정결하고 다정하게 고운 글씨를 쓰고 싶은데, 글씨도 혹시 성격을 따라가는 건 아닌가? 살짝 의심해 본다.

매일 아침 하얀 종이 위에 글 쓸 때 다짐한다. 바른 글씨로 정갈하게 '풋' 한 문장 쓰고서는 의지는 사라지고 손가락 움직임에 맡겨 버린다.


손 글씨가 몹시 고픈 날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고 휘리릭~ 종이 위에 콕콕 박혀 버린 못난이 글씨체를 보면서 도대체 무슨 글을 쓴 거냐고 속을 태운다. 생각을 또박또박 뽑아 쓰다 보면 생각이 날아가 버리는데 한번 날아간 생각은 내 것이 아닌 거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작가님들은 글감이나 문장이 떠오를 때 어떻게 남겨두는지 궁금하다. 한번 집 나간 문장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조급함이 되려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들이 든다.


글씨가 곱고 다정했으면 좋겠다. 예쁜 글씨가 예쁘게 인사했으면 좋겠다. 어제 무턱대고 썼던 손 글씨가 무슨 내용인지 한눈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멋진 문장은 아니었지만, 어제 집 나간 문장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한 줄 요약 : 예쁜 글씨로 예쁜 글 쓰고 싶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손 글씨#문장#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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