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연정

인연인지 악연인지

by 바스락

꽃다웠던 열여덟 엄마의 청춘이 비껴간 시절, 아버지를 만났다.


엄마가 솔찬히 노래를 잘해서 친구랑 둘이 노래 부르러 다녔는디,

한 번은 할아버지한테 딴따라 한다고 크게 혼났어야, 그래도 노래 부르는 게 그라고 좋드라.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시집가라는 디, 오메 시상이 그라고 무섭드라, 아버지는 무섭제, 친정 식구들은 쫄쫄 굶고 있제, 엄마가 시집만 가믄 논 3마지기가 우리 땅이 된다는디, 그걸 으트게 포기한다냐, 그랑게 엄마는 아부지 얼굴도 못 보고 시집왔으야,




식구들 배곯지 않아도 되는데, 눈 딱 감고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잘 살면 된다고 쓰린 마음을 달랬다. 결혼식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남편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다. 첫날밤을 보내고서야 남편 얼굴을 볼 수 있다니,

연정 품은 사내를 만나고 싶었는네 허망하고 허망했다.


혼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도망이라도 치듯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에 고주망태가 되어 잠든 남자랑 평생을 살아갈 생각 하니 목구멍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문을 열어보니 넓은 마당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아, 부잣집이라더니 대궐 같은 집이구나! 방문 앞에 웬 지팡이가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부엌을 찾아 헤맸다. 벌써 형님들이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4남 1녀 셋째 아들에게 시집왔으니 두 명의 형님을 모셔야 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야무지게 하던 대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손도 야무지고 눈치고 여간 빠르다.


친절한 사람이 별로 없다. 눈치껏 할 일을 찾아서 해야겠다. 아침을 먹고 치울 때까지 남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못 알아본 건 아니었는지. 설거지하고 잠시 방으로 건너갔지만, 남편은 없고 이부자리는 한쪽으로 포개어 있었다. 문 앞에 있던 지팡이도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째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박 당한건가? 이대로 쫒겨 나는건가?


아무도 남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어머님 내쫓을 것 같아 숨 한번 크게 쉴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형님들도 나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소행성에 나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기분이다. 아버지가 무서워 쉽사리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낯선 곳에서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텅 빈 방이 허허벌판 같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고 고운 처자가 안 됐다고 말한다. 꼬박 4일이 지나고서야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해 아주버님 등에 업혀 왔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술 냄새와 꼬질꼬질한 형색을 보니 며칠 씻지도 않았는지 체취가 역했다.


“제수씨 이놈 며칠 잠도 안 잔 것 같응 게 일단 재우고 일어나면 씻거주씨오”


아주버님은 방문을 열고 등짝에 매달려 있던 남자를 툭 내려놓더니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파도처럼 흩어졌다.


“여직 있었는가, 도망갈 시간 줬는디 여태 여그 있으면 으짠단가”


들릴까 말까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그제야 눈이 감긴 얼굴을 촘촘히 들여다봤다.

낯설지 않았다.


사라졌던 지팡이가 다시 방문 앞에 놓여 있었다. 그 후에도 남편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아무도 남편의 거취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 집에서 나는 살 수 있을까. 시댁에서 뼈를 묻으라는 아버지가 무서웠고 삼시세끼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알았다. 문 앞에 지팡이가 누구 것인지,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날은 투전판에서 돈이 떨어진 날이라는 걸,


‘내 꿈은 가수였다.’



#아버지#엄마#혼례#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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