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흰머리
아버지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는 아버지 성향을 닮은 것 같다. 소주 한 잔에 고추장 찍어 먹을 마늘쫑 한 줄만 있으면, 온 세상이 아버지 세상이었다. 입가에 번지는 순박한 미소 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가끔 엄마가 오징어초무침이라도 만들면, 오늘은 안주가 좋다며 멋쩍은 웃음을 짓곤 하셨다.
한잔 두잔 술잔을 비우는 아버지 얼굴에 슬쩍슬쩍 비추는 슬픔이 연민으로 느껴지기 전까지 삶에 걱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배짱이라 생각했다.
나는 가끔 아버지 세상이 궁금했다. 대문이 없는 작은 집, 채송화가 돌담 밑으로 피고 지는 여름, 가을, 겨울이 잠시 머물다 가는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곳, 노란 장판 아래 거친 시멘트 속살을 감추고 있는 1평 남짓한 토방 한 귀퉁이 그곳이 아버지 세상의 전부였다.
볕이 따뜻한 날은 종일 그곳에 앉아 해를 보고, 달을 보고, 바람을 보내고, 세월을 보내셨다.
마을 끝까지 가면 한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그 길을 어린 나는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곤 했다. 아버지는 너무 빨리 자신의 문을 닫아버렸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당신도 나올 수 없는 돌덩이를 쌓고 있었다. 영혼의 상처조차 외면한 채.
주1> 영혼은 사람이 항상 품고 있는 생각과 똑같은 종류의 것이 된다.
영혼은 생각에 의해 그 생각과 같은 색깔로 물들여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머물던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아버지의 익살스러운 눈빛과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보일듯 말 듯 장난기 있는 미소가 나는 좋았다.
해 질 녘 토방에 걸터앉은 아버지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부지 흰머리 있어, 내가 뽑아줄게.”
“인자 머리도 흐해지냐, 아부지도 나이 묵었는갑다”
“아따 보기 싫은 게 뽑아브러야”
싫다고 손사래 칠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셨다. 보물찾기하는 것처럼 검은 머리 사이에서 흰머리를 뽑았다. 능청스럽게 아버지 머리를 수색하고 아버지 손위에 휜머리를 올려놓았다.
“아따 이라고 많다냐, 인제 그만 해라잉 아부지 머리털 다 뽑아불것다”
머리숱이 많지 않던 아버지는 내가 뽑은 흰머리를 보며 '오메' 하며 웃고 계셨다. 유독 머릿결이 가늘고 숱이 없었던 아버지. 칭찬받고 싶은 욕심에 보이는 족족 뽑았더니 아버지 머리가 휑해졌다.
가끔 일상은 한편의 단편 소설 같다. 햇살 아래 아버지 흰머리를 뽑았던 그날 평화로웠고, 아버지에게 소중한 아이가 된 기분, 가을 햇살이 유독 그립고 따사로운 이유다.
얼마 전부터 앞 통수랑 옆통수가 간질간질하더니 흰머리가 한 움큼씩 나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간지러워 벅벅 긁다 말고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따 대그빡이 이라고 간질거리믄 흰머리 난다더만 아부지 인자 흰머리로 도배 할란갑다”
어느덧 아버지의 청춘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주2> 죽음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다는 뜻이 아니다.
늘 기쁨 속에 살면서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동백꽃은 활짝 필 때도 예쁘지만 한 번에 '툭' 떨어져서도 한동안 활짝 핀 상태를 유지한다.
하얀 눈 속에서 빨간 자태를 뽐내는 동백꽃처럼 아버지와의 추억은 잔잔한 향기처럼 속삭인다.
기억은 그곳에 머물러 있는 동백꽃이다.
주1> 명상록, 아우렐리우스
주2>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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