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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Dec 30. 2015

#1 영화 <트라이브>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영화를 본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가장 처음 당혹스러웠던 것은 도대체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움직이는 인물에 시선이 가기는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카메라가 정지해있고 귀를 기울일 어떤 소리도 들이지 않을 때, 어디에 시선이 향해야 할 곳을 잃어버리곤 했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부분 청각적 정보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영화를 시각적 예술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청각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트라이브'는 어떠한 대사도 자막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그동안 쉽게 겪어보지 못한 시각으로서의 영화를 체험하게 한다. 


영화는 쇼트의 전환이 거의 없이 대부분 롱테이크로 이루어졌다. (총 34개의 쇼트만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롱테이크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정적이고 느리다는 인상을 주진 않는다. 아마도 그건 핸드헬드를 이용하여 마치 춤추듯이 혹은 홀린 듯이 인물들을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화면의 대부분이 인물을 쫓아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대사가 없이 수화로만 이루어져 있어 와이드 스크린의 화면은 인물의 얼굴에서 보이는 미세한 떨림보다는 역동적인 움직임에 주목하게 한다.


그 남자(세르게이)의 욕망에 부쳐



영화 속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가장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고 있는 한 순간, 영화의 19번째 쇼트에서였다. 세르게이가(영화 속에선 대사도 설명도 없기 때문에 극 중 인물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영화를 본 후 네이버 영화 설명에 남자의 이름이 '세르게이', 여자의 이름이 '안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처음으로 안나에게 돈을 주고 관계를 가지는 장면에서, 자물쇠로 잠가진 보일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안나와 섹스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보일러실의 문을 닫지 않는다. 물론 늦은 저녁의 인적이 드문 곳이긴 하나, 그들의 관계 상 성매매가 당당하지 않고 안나의 친구가 곧 그 길을 지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한다. 아니, 굳이 추가적인 설명을 붙이지 않더라도 문을 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 순간에는 그 움직임이 생략되었다. 혹은 불필요했다.


영화의 두 번째 쇼트, 세르게이 처음 이 학교로 들어온 날. 실내로 들어가기 위해 유리문을 두드리지만 안에 있는 청소부는 건물을 돌아서 반대편 문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학교의 첫 방문에서 세르게이는 한참 건물을 돌아간 뒤 열려있는 문을 통해 다른 모든 학생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통과한다. 그리고 처음 기숙사를 방문한 6번째 쇼트에서, 스스로 방문을 열지 못하고 다른 친구가 열어주었을 때 강제로 그리고 억지로 방 안에 들어갔다. 또한 그 방의 다른 룸메이트들에게 쫓겨나는 8번째 쇼트에서, 복도에 쫓겨나 있다가 안나의 일행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자연스레 그들을 따라간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어서 세르게이는 더 이상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서둘러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세르게이는 바라본다. 카메라는 세르게이의 시선을 대신하는데 여기에는 호기심과 욕망이 담겨 있다. 학교에 새로 들어온 세르게이는 쉽게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한다. 그저 문 밖의 자신이 통과할 수 없는 세상을 욕망할 뿐이다.


세르게이의 이러한 욕망이 충족되는 시점은 정확히 무리로부터 인정받으며 매춘을 위해 여자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일 것이다. 트럭은 늦은 밤 몰래 나가기 때문에 이를 위해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트럭 관리는 문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능력과 정확히 같은 위상을 가진다. 문 밖의 세상을 욕망하던 세르게이가 트럭 관리를 통해서 문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고, 그 순간 정확히 안나와 처음으로 섹스를 하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다.(안나와 섹스를 하기 위해 보일러실을 들어갈 때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 여자(안나)의 욕망에 부쳐



문을 열고 닫는다는 문제에 대해서 세르게이와 반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성매매를 하는 안나와 친구, 두 여자가 있다. 그녀들은 성매매를 하러 갈 때나 혹은 다른 일이 있어서 시내로 나갈 때도 언제나 트럭의 뒷 칸에 탄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이가 트럭의 뒷문을 열어줄 때 그녀들을 내릴 수 있다. 심지어 성매매가 이뤄지는 화물차에 올라탈 때조차 그녀들은 스스로 문을 열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신의 손으로 절대 트럭의 문을 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매번 다른 이들이 그 문을 대신 열어준다. 그녀들은 이탈리아 행을 욕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충족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스스로의 힘으로는 충족이 불가능해 보인다.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관공소에 방문한 것처럼 보이는 23번째 쇼트에서 여자들은 트라이브의 보스('세르게이'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네이버 영화 설명에서 학교 내 불량 조직의 이름이 '트라이브'라고 한다.)와 대머리 교사에 의해 차례대로 전달되어 옮겨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측면으로 움직이며 보스와 교사를 따라가다가 여자들을 보여주고, 다시 보스와 교사를 따라 측면으로 움직여 돌아온다. 또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대사관에 방문한 것처럼 보이는 29번째 쇼트에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서류가 대머리 교사, 트라이브 보스, 두 여자 그리고 다시 트라이브 보스, 대머리 교수의 순서로 정확히 옮겨진다.(이 움직임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중간에 한 번 더 반복한다.) 이때 카메라는 역시 측면으로 움직여 인물들을 순서대로 따라간다. 이처럼 그녀들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고 비자를 신청하는 과정은 트라이브의 보스와 대머리 교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카메라는 마치 그들 사이의 객관적인 권력의 상하구조를 구분해 내듯이 그들을 순서대로 담는다. (그녀들이 성매매를 하는 것 역시 이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들의 욕망에 부쳐


영화를 다소 거칠게 구분하면 세르게이와 안나가 첫 번째 섹스를 하는 19번째 쇼트를 기점으로 전반부에서는 세르게이의 욕망을 볼 수 있고, 후반부에서는 안나의 욕망을 볼 수 있다. 전반부를 지나면서 세르게이의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느끼게 되지만, 후반부를 통과하면서 그것이 충족되기가 힘들어 보이게 된다. 세르게이와 안나는 영화 속에서 총 3번의 섹스를 한다. 세르게이에게는 세 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이 모두 돈이라고 생각했지만, 안나에게는 세 번이 모두 각각 달랐다. 첫 번째는 이탈리아행을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한 섹스였고, 두 번째는 낙태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한 섹스였다. 그리고 세 번째에서 세르게이는 더 큰 돈을 가져왔지만, 그는 더 이상 안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 (안나는 세 번째 관계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거부하며 세르게이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세르게이는 욕망의 충족에 실패한다.


영화의 후반부 30번째 쇼트. 교실의 칠판에는 남자의 성기가 그려져 있다. 교사는 남자의 성기를 지우고 거기에 망치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세르게이는 망치를 완벽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이 순간 세르게이가 가지고 있는 성기의 욕망은 정확히 망치로 치환되며, 이것은 폭력으로 발현된다. 영화의 마지막 34번째 쇼트, 눈 오는 저녁. 세르게이는 투벅투벅 걸어가 열쇠로 문을 열고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씩 잔인하게 살인한다. 이 일련의 살인은 바로 이전의 쇼트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복수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안나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트라이브의 보스, 대머리 교사의 연쇄가 없으면 안나의 욕망이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트라이브의 보스 그리고 멤버들이 죽은 이 순간, 이제 더 이상 안나는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린다. 살인을 마치고 세르게이는 다시 자신이 걸어왔던 복도로 걸어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의 시작이었던 바로 그 문. 그곳으로 나가면서 세르게이는 문을 닫아버린다. 이 순간 카메라는 그곳에 멈춰 설 수밖에 없다. 2시간 12분 동안 시종일관 인물을 쫓아다니던 카메라는 이제 더 이상 따라갈 곳을 잃는다.


당신의 욕망에 부쳐



이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앞서 나왔던 몇 개의 쇼트를 되짚어 보려 한다.


앞서 8번째 쇼트에서 카메라가 세르게이의 시선을 대신할 때 거기에는 호기심과 욕망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르게이는 닫혀있는 문을 통과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쇼트, 트럭의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두 여자의 모습으로 옮겨간다. 세르게이가 충족하지 못했던 호기심과 욕망을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은 너무도 쉽게 충족해 버린다. 한참을 달리던 트럭이 정지한 순간 카메라 뒤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트럭의 뒷문을 열어서 여자들을 내리게 한다. 트럭의 문을 여는 모든 장면에서 조수석의 남자가 조수석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내린 뒤 트럭의 뒷문을 여는 것에 비해 이 순간만큼은 카메라를 스치듯 나와 트럭의 문을 연다. 카메라의 뒤, 관객의 자리. 관객만이 욕망을 충족시켰던 이 순간에 관객의 자리에서 나와 트럭의 문을 열고, 트럭의 밝은 조명이 두 여자를 비추며 따라가면 그녀들은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 돈을 받고 섹스를 한다. 카메라, 관객, 조명 그리고 섹스.


영화의 16번째 쇼트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뒤에서 다가오는 화물차를 인식하지 못해 죽게 된다. 이 순간 카메라는 기존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전까지 인물의 움직임에 맞춰서 카메라가 따라가는 방식이었다. 즉, 인물이 움직일 때 카메라도 움직였으며, 인물이 움직이지 않으면 카메라는 멈춰서 지켜봤다. 하지만 이 순간, 인물을 담배를 피기 위해 제자리에 서있는데, 인물의 뒤에서 따라오던 카메라는 멈춰있는 인물의 주위를 180도로 뱅돌아 인물의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죽는 장면을 화면에 담아낸다. 인물의 뒤에서 따라오던 카메라의 위치는 화물차의 바로 뒤쪽이기 때문에 카메라가 계속 거기에 있었다면 화물차는 후진을 하여 인물을 칠 수 없다. 이를 다르게 얘기하면, 카메라가 낯선 방식을 이용하여 굳이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에 그는 무참하게 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죽었기 때문에 세르게이가 트럭을 관리하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었다. 카메라의 움직임, 관객의 시선 그리고 죽음.


이 글의 서두에 이상하다고 말했던 19번째 쇼트, 첫 번째 섹스 장면에서 그들이 보일러실의 문을 닫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그들이 문을 닫는 것을 연속의 화면으로 찍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인물이 문을 열고 들어온 뒤 가만히 있으면, 카메라가 그 문을 통해 들어와 180도 시선의 방향을 바꿔 문을 닫는 인물을 찍은 뒤, 다시 문을 닫은 인물을 180도 시선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촬영은 바로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물을 죽일 때만 행해졌던 방식입니다. 이를 거부하고 문 닫는 과정을 찍어버리면 두 가지 사태 중 하나가 발생한다. 카메라가 문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카메라가 시선의 방향을 바꾸지 않아 문을 닫는 인물이 카메라의 프레임에서 사라지거나. 그리고 이 두 가지 사태의 공통점은 카메라가 인물을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이다. 즉, 문을 닫지 않는 것은 인물을 카메라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문을 닫지 않는 것은 시각이라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시각이라는 관객의 욕망.


이 글의 서두에 얘기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극 중 인물들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청각에 의존하지 않고 영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지만 청각이 마비된 인물과 청각이 마비된 관객의 사이에는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 살인 장면. 이 장면이 유독 충격적인 이유는 잔인한 살인의 방식보다도, 옆에서 자고 있는 인물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 순간 청각장애 때문에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청각장애 때문에 곧 벌어질 자신의 죽음을 그저 자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옆에서 죽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닥쳐올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이 옆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만 있었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다. 정확히 영화 속 인물들은 청각장애가 시각장애를 동반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들과 다르다. 오히려 우리는 청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청각의 상실을 보이는 것에 더 몰입하게 되고, 시각의 욕망은 오히려 더 강화된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적 특징은 정확히 앞서 말했던 지점에 맞닿아 있다. 청각이라는 장애. 대사와 자막의 부재.  컷이 나눠지지 않는 극단적 롱테이크. 그리고 이 모든 공간에는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각적 욕망이 있다. 그 시각적 욕망이 이야기를 처참한 결말로 몰아넣는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살인을 저지를 세르게이를 우리의 시선이 쫓을 때 세르게이는 문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그를 따라가며 바라볼 수 없다. 세르게이의 욕망은 실패했고, 안나의 욕망은 살해됐고 마지막으로 관객의 욕망은 닫혀버린다. 모두의 욕망이 실패한 그 지점에 정확히 영화는 끝난다. 마지막에 세르게이가 내리쳤던 머리는 영화를 바라보던 우리의 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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