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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an 01. 2016

#2 영화 <나이트 크롤로>

그는 성실하게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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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스며든 고요한 LA의 밤. 한 남자(루)가 절단기로 쇠창살을 끊고 있다. 뒤이어 경비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음성이 들리고 절도를 하던 루와 경비원의 대화가 오간다. 경비원이 차고 있는 고급시계의 클로즈업과 원경에서 찍은 두 남자의 짧은 몸싸움으로 씬을 마친 뒤 자동차를 타고 있는 루의 모습으로 범죄를 설명한다. 절도 행위자체가 비교적 간결한 방식으로 찍혔다.

얼마 뒤 나오는 자전거 절도 장면은 세 개의 쇼트만으로 더욱 간결하게 구성되어 있다. 해변가에서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면서 다가오고 그 곁에 주인공이 앉아 있다.(1), 남자가 자전거를 묶고 있다.(2), 주인공이 머리를 묶고 있다.(3)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자전거를 훔친 주인공이 중고로 되파는 장면이 이어 진다. 묶는 동작의 연속성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쇼트만을 이용해 자전거 절도는 완결된다.

이 두 개의 장면에는 부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리액션이다. 두 장면 모두 범죄가 시작하자마자 혹은 시작하기도 전에 종결된다. 때문에 그 행위는 범죄일 뿐 죄의식의 감정이 없다. 그저 훔치는 행위와 훔친 것을 파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나의 액션은 있는데 너의 리액션은 없다. 또는 나의 액션 뒤에 다시 나의 리액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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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는 사고현장을 촬영한 뒤 영상을 방송국에 팔아 돈을 버는 인물이다. 우연한 계기로 교통사고 현장의 영상을 팔아 돈을 버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길로 장비를 구해 사고현장을 쫓는다. 처음 루가 사용하는 기술은 사고현장에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 경찰관에게 허가를 받았다고 거짓말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내 방송국에서 원하는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허가받지 않고 범죄가 일어난 주택에 침입하고,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 다친 사람을 끌어서 옮긴다. 국장에게 자신은 앵글을 신경쓴다고 말하는 루의 모습을 보면 그는 정확히 자신의 전략적 기술을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략은 갈수록 발전한다. 

독특한 점은 사고를 취재하는 방식이 갈수록 범죄의 형태를 띄지만, 그것이 폭발하는 욕망이 아니라 전략의 완성으로 보인다. 욕망은 결여를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점점 더 커지는 욕망에 휘둘리며 거기에 매혹되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경쟁상대가 동업할 것을 제안했을 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혼자서 작업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언뜻 보기에 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최소한 그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죄의식을 못느낀다는 점에서 소시오패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차라리 그는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는 성과기계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근대적 의미에서 성실한 노동자이다. 그의 생활패턴은 정확히 자동차-방송국-집을 반복한다. 늦은 저녁부터 자동차에서 밤새도록 성실히 일하고 방송국에 들려서 그 결과를 확인받은 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작업결과를 확인하고 얼마 없는 셔츠를 다리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하루의 전부이다. 니나와 저녁약속을 잡은 뒤 그는 자신의 권력과 니나의 약점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져야할 섹스신은 없고, 심지어 작은 스킨쉽조차 그려지지 않는다. 성실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에게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는 그저 성실하고 재능있는 노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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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친 철골을 팔러가서 사장에게 취업을 얘기할 때, 그는 자신을 어필한다. 높은 목표. 끈기. 자긍심. 그리고 지금 세대는 이전의 세대와는 다르며, 무급으로 인턴쉽도 할 수 있는 열정. 두서 없는 나열되는 말들에는 서로 연결되지 않으며, 언뜻보면 많은 고민을 겪은 뒤 나온 결론같지만 실은 그저 반복적으로 들어서 암기한 내용일 뿐이다. 국장을 만난 자리에서 인터넷에는 없는 정보가 없으며, 인터넷으로 경영학도 공부해서 교양을 쌓았다고 말한다. 그가 내뱉는 모든 교훈은 자기계발서에 있을 법하고, 그가 말하는 지식은 인터넷 '스낵컬쳐'일 뿐 이다.

 세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속도는 우리를 압박한다. 갈수록 우리는 빈곤해지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더 높은 강도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하라고 강요받는다.  동시에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 여기에 사회비평을 더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다. 하지만 분명 사람들은 지식과 교훈을 얻기 위해 더 짧은 시간을 소비한다. 때문에 지식은 직관 근처에 머물고 사유는 자리를 얻지 못한다. 이제 교훈은 듣기 좋은 아포리즘에 불과하다. 그렇게 침투한 음성은 그를 둘러싸고 있다. 내뱉는 장광설에 그의 목소리는 없고 그저 주입식으로 암기된 지식을 나열할 뿐이다.

죄의식이 부재한 채 엄격한 성장논리로 진화해가는 범죄의 기술적 완성도. 그리고 자기개발을 목표로 전진하는 개인. 그 모든 것은 기저에는 루가 내뱉는 장광설이 있다. 그는 정말로 그 말들을 순수하게 실천에 옮기는 중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의 전진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는 더욱더 완성도 높은 영상을 만들고 많은 수익을 올리는 회사를 경영하게 될 것이다. 그 성장 앞에서 감독은 그저 묵묵히 이젠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건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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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우뚝 선 방송국 첨탑의 이미지는 반복해서 보여진다. 고요한 저녁, 티비 바로 옆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며 루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 화분에 있는 식물도 방송국의 첨탑처럼 우뚝 솟아 있다. 어떻게 범인인지를 알았냐는 경찰의 심문에 주인공은 화분의 물을 주면서 창밖을 내다 보고 있을 때 범인들의 검은색 차량을 보고 깨달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주인공은 본 것은 범인이 아니다. 꺼진 티비 옆에 우뚝 솟은 식물에 물을 주는 주인공은 사업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카메라와 방송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은유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미디어보다 나를 공포스럽게 한 것은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전진이었다. 카메라와 방송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사회가 우리에게 권하는 있는 질병 그 자체를 경고한다. 루의 광기에서 우리 역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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