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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Jan 09. 2016

#3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쿠바의 음악이야 크게 울려 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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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제작자 라이 쿠더는 음반제작사의 제안으로 쿠바의 뮤지션들과 쿠바의 음악으로 음반을 제작하기로 한다. 은퇴를 앞두거나 연주를 그만 둔지 오래인 음악가들이 만들어낸 음악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어 유럽과 미국의 중심에서 공연을 펼친다. 빔 벤더스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만들어진 그들의 소리를 담는다. 영화를 본 뒤에도 여전히 귓가에 머무는 그들의 음악소리를 쫓아 짧은 생각을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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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지적이면서 아름다운 영화이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벌어지는 장면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암스테르담의 대형 공연장. 그곳을 가득 채운 청중들. 그들의 환호 속에 음악가들이 하나둘씩 무대 위로 오른다. 이내 쿠바의 지저분한 거리.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노인들. 그들은 카메라를 보며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이를테면,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음악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쿠바에서의 평범하고 초라한 일상들.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는 카메라는 그들의 주위를 빙빙 돌고, 저 멀리서 그들이 내는 소리를 쫓아 천천히 다가간다. 섬세하고 따듯하게 그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음악 주위를 거니는 카메라는 그들의 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인다.


쿠바의 거리와 초라한 녹음실에서 그들의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동시에 수 많은 청중 앞의 암스테르담 무대 위에서도 그들의 음악이 흐른다. 두 개의 공간과 하나의 음악. 두 공간을 영화는 하나의 음악으로 끌어안는다. 두 공간을 오가는 화면은 자칫 화려한 무대와 초라한 일상으로 나눠 서로의 간격을 벌릴 수 있다. 이러면 일상은 더욱 가여워지게 된다. 이때 하나의 음악이 서로 다른 공간을 무화시킨다. 이 순간 우리는 쿠바의 늙고 초라한 음악가가 청중 앞의 화려한 음악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들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화려한 무대에 서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듯이. 그들은 무대 위에 서지 못했을 때도 이미 아름다웠다는 듯이. 암스테르담의 관중 앞에서 노래를 하든 은퇴를 해서 쿠바의 시끄러운 거리에서 노래를 하든 그들의 음악은 충분히 아름다웠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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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아름다우면서 지적인 영화이다. 


영화는 쿠바 혁명 당시의 사진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사일의 폭격과 총을 든 소년. 그리고 링컨 동상에 헌화하는 카스트로. 그 사진을 보며 다윗과 골리앗에 비유한다. 쿠바 혁명의 기록. 그 아름다운 승리.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역사에 대해서 말할 능력은 없다. 다만 이 영화가 경유하는 혁명의 소리에 대해서만 생각해 볼 뿐이다. 


쿠바와 암스테르담을 오가던 카메라는 갑자기 뉴욕 한 복판으로 공간을 옮긴다. 그리고 그 중심의 카네기홀. 그곳에서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무대를 시작한다. 흥겨운 그들의 음악과 그것에 열광하는 미국의 청중들. 힘차게 울려 퍼지는 마지막 음악 속에  불현듯 카메라는 쿠바로 자리를 옮긴다. 쿠바 거리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표정. 오래된 벽면. 벽면에 붙어 있는 혁명의 기운. 그들의 힘찬 일상. 그곳에 붙어 있는 체 게바라와 마르크스의 이름. 다시 뉴욕의 공연장으로 카메라는 돌아오고, 공연을 마친 쿠바의 음악가들은 무대 위에서 힘차게 쿠바의 국기를 흔들고 미국의 청중들은 박수 치며 환호한다. 쿠바의 음악은 쿠바라는 국가와 함께 존재한다. 영화는 분명 쿠바의 음악인 동시에 쿠바에 대한 은유이다. 영화의 첫 장면. 카스트로와 링컨의 사진을 보며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하던 시선을 거쳐 카네기홀에서 환호받는 쿠바의 음악인들은 그 자체로 다윗의 승리를 말한다. 쿠바에서 펄럭이던 국기는 뉴욕의 한 복판에서도 펄럭이듯이 쿠바의 혁명은 다윗의 승리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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