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 여기 네루다는 없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겹쳐졌을 때

by 윤근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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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낯선 감독,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가 올해 연달아 한국에서 개봉했다. 한 편이 1월 개봉한 '재키'이고 다른 한 편은 5월 찾아온 '네루다'이다. 그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영화 모두 실존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다. 실존 인물을 다룰 때 감독은 필연적으로 그 인물에 대한 태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재키'의 경우 다소 과감하게 이 문제를 통과했다. '블랙스완'의 감독인 '대런 아로노프스키'로부터 재키의 연출을 제안받았을 때 파블로 라라인은 재키 즉, 재클린 케네디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연출에 그가 이끌렸던 것은 재키에 대한 정보가 서로 다르고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역사의 일부분임에도 그녀의 서사에는 어딘지 구멍이 뚫려있었다. 때문에 파블로 라라인의 연출은 재키를 모호하게 그리고 있으며, 대신 그녀를 퍼스트레이디가 아닌 여성의 위치로 포착해 냈다. 하지만 칠레의 감독이 칠레의 시인이자 역사인 네루다를 선택했을 때, 그의 개인적 서사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영화 '네루다'를 통해 보려 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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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는 한 남성을 마주한다. 아마도 그가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파블로 네루다'일 것이다. 기자들의 질문과 카메라의 밝은 후레시가 그에게 향한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에서 한 남자가 연설하듯 네루다를 향한 비아냥과 함께 물음을 던진다. "대체 네루다라는 인간은 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뒤에 덧붙는 공산주의자 라거나 법을 어긴다는 서술보다도 '네루다는 어떤 인간이냐'는 물음 그 자체에 있는 듯하다. 영화는 정확히 그 물음으로 시작한다. 뒤이어 아내인 델리다가 얼굴을 분장한 네루다를 보며 누군지 못 알아보겠다고 얘기할 때, 정면을 바라보는 네루다와 델리다의 표정은 영화의 도입부에 제시됐던 물음의 반복이다. 네루다는 누구인가. 뒤이어 나체의 여자들과 뒤섞여 술을 마시는 지식인들의 무리 속에서 네루다는 여전히 과거의 시를 읊고 있다. 퇴폐적 유흥에 취해 과거의 시를 반복하는 네루다와 정치적 지도자이자 민중의 희망인 네루다 사이의 간극. 영화는 이 간극 사이에서 쉽게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그 사이를 마치 피카소의 예술세계처럼 혹은 아내가 그리는 말의 그림처럼 입체주의 양식을 띈 듯 서로 다른 시선의 위치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네루다를 그린다. 이를 테면 테이블을 앞에 두고 벌어졌던 상원의장과 네루다의 대화는 계단을 배경으로 한 짙은 그림자 안에서 이어지고, 뒤 이어 텅 빈 의회장으로 넘어간다. 장소의 이동과는 무관하게 영화는 그들의 대화를 선형적으로 잇는다. 뒤이어 나라를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를 두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원형으로 서있는 그들을 둘러싼 카메라는 점프하듯 위치를 바꿔가며 그들의 대화를 담는다. 이러한 편집의 방식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반복되며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대화를 두고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파편적으로 쪼갠 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붙여져 있다. 이러한 영화의 파편적인 시선을 경유하여 네루다를 바라보았을 때, 네루다라는 존재를 하나의 명확한 인물로서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진다. 네루다는 오직 다양한 시선의 총합이자 분열적 파편의 충돌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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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난반사하는 빛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는 네루다를 대신하여 영화의 중심축으로 기능하는 것은 경찰인 오스카이다. 우리는 오스카의 나래이션과 함께 영화를 본다. 네루다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의 파편 속에서 분열적으로 나타날 때, 오스카의 나래이션은 장면과 장면 사이를 이어나가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 쫓기는 네루다와 쫓는 오스카. 어딘지 대척점에 서있는 듯 한 두 인물은 각각 하나의 질문과 이어진다. 네루다를 향한 질문이 '그는 어떤 인간인가'라면, 오스카에게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가'라고 묻는다. 오스카는 경찰청장 올리비에 페룰쇼노의 동상을 보며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를 천한 존재로 대하는 대통령 비서의 태도는 그것이 명확하지 않음을 말한다. 오스카의 부모에 관한 장면은 한 번 더 반복된다. 네루다를 쫓아 매춘부들이 모여있는 술집을 찾은 오스카는 여기가 자신의 고향이며 이 여자들이 자신의 엄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뒤로 농담처럼 여자로 분장한 네루다가 숨어있다. 오스카의 어머니, 네루다. 물론 후에 오스카는 네루다가 쓴 소설의 등장인물임이 밝혀진다. 하지만 농담 같은 이 장면이 단순히 영화의 결론을 암시하기 위한 복선만은 아닐 것이다.


나래이션의 목소리로 먼저 우리에게 존재를 알린 오스카는 영화가 시작한 지 14분 후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도망자의 삶을 살겠다는 네루다의 다짐과 우스꽝스러운 배경을 뒤로한 사진 촬영에 이어 한 인물이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폐허의 풍경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는 그의 버거운 걸음걸이가 롱테이크로 그려진다. 뒤 이어 네루다의 걸음이 점프 쇼트로 이어진 뒤에야 걸어가는 오스카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난다. 이 순간 네루다와 오스카가 겹쳐지는 것은 걸어가고 있다는 동작뿐만이 아니라 걸어가는 모습을 담는 편집의 방식까지 일치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앞서 등장한 수용소로 끌려가는 걸음을 담음 롱테이크는 네루다와 오스카의 당당한 걸음을 담은 분할된 편집을 두드러지게 한다. 세 개의 독립적인 걸음걸이 씬이 낯설게 이어지며, 네루다의 등장이 서사적으로 불필요한 잉여임을 생각했을 때, 오스카의 등장 방식에서 나타난 네루다와의 유사성은 평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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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네루다를 오스카의 어머니로 위치시키는 농담 같은 장면과 오스카의 첫 등장 장면에서 생긴 잉여의 도입부는 조심스레 네루다와 오스카를 겹쳐놓게 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추격 서사에서 서로 대척점에 놓인 두 인물을 두고, 영화는 그 둘이 하나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노동자들이 네루다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노동자들은 반복해서 묻는다. 노동자와 부르주아는 같은 인간인가요. 우리는 모두 평등해질 수 있나요. 거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네루다의 모습에 감동을 하기엔, 영화에서 보여지는 네루다의 모습은 퇴폐적이고 파편적이다. 대신 영화는 하층민인 오스카와 정치적 지도자인 네루다를 같은 자리에 위치시킨다. 그렇게 영화는 지식인과 노동자가 평등하다고 대답한다.


오스카는 네루다를 쫓아 흰 눈으로 뒤덮인 국경에 도착하고, 이제 네루다는 거의 잡힐 듯 가까이 있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오스카와 오스카의 소리를 들은 네루다는 서로를 향한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오스카와 그를 발견한 네루다는 대화가 불가능하지만 서로를 마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내뱉는 말은 겹쳐져 하나가 된다. "배경은 백색의 눈과 말... 실은 네가 나를 만든 거야" 이 말은 오스카를 만든 네루다의 언어이기도 하고, 네루다를 향한 오스카의 언어이기도 하다. 동시에 지식인의 언어이자 노동자의 언어이다. 영화 '네루다'는 인간 네루다에 대해서 어떤 것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신중한 실패로 느껴지는 것은 실패를 의도한 뒤 도착한 곳에 지식인과 노동자의 언어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네루다가 어떤 인간인지를 증명할 수 없었던 영화는 지적 이게도 시인인 네루다와 천한 존재인 오스카를 동등하게 위치시키며 사회주의의 전언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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