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불법적으로 집권하려는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목숨을 건 역사적 사건이자 시대의 아픔’이다.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이렇게 역사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빨갱이와 북한국을 들먹이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남아있다. 저열한 그들에 맞서 어떤 이들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숭고한 그 날의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날의 광주에 있었던 이들의 고통을 다룬 <화려한 휴가>. 망각으로부터 저항하려는 1000만 관객의 <택시운전사>. 그리고 다큐멘터리. <김군>.
영화의 시작은 군사 평론가 '지만원'의 막말이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으로 규정하며, 광주 도심에서 찍힌 사진 속 인물들을 북한의 군인 및 간부들과 매치시킨다. 그리곤 여기에 얼굴 감정 이론을 끌여들여 와 몇 개의 선을 긋더니 사진 속 인물이 북한군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의 시대에 사이비 과학은 너무나 손쉽게 과학인 양 흉내를 낼 수 있다. 억울한 광주의 시민들은 지만원이 북한군이라고 주장하는 사진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선다. 여기에는 역사의 피해자들이 스스로의 정당함을 증명해야 하는 역설이 있다.
영화는 마치 추리극처럼 지만원의 사진 속 인물들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광수 1번’.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군용트럭 위 사진이 찍힌 그 날의 사건은 하나둘 사람들의 기억이 모여 재구성된다. 하지만 누구도 ‘광수 1번’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다. ‘광수 1번’, 동시에 ‘김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이. 오래전 청문회의 인터뷰 속에서 ‘김군’이 사살되었음이 증언되기도 했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그 날의 ‘김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영화의 끝에 ‘김군’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는 생각보다 광주 시민들 가까이에서 살고 있었다. 이 영화의 놀라운 지점은 그날의 기억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왜 기억되지 못했는가를 숙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김군’은 왜 잊혀졌을까. 간간이 ‘김군’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고아원출신의 넉마주이였다는 사실을 회고해낸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지식인 대학생 위주로 기록된 역사에서 넉마주이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들이 증명되지 못했던 것은 이들을 북한국으로 모는 이들의 악랄함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고아원의 넉마주이라는 불투명한 출신때문이었다. 모두가 그날의 사진에 찍혀있었음에도 지식인 대학생과 가난한 넉무주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었다. 민주주의가 뭔지는 잘 몰랐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트럭에 올라섰고, 그 순간 더는 소외와 무시가 아닌 사람들의 응원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음이 좋았다는 인터뷰는 어쩌면 가장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 태어난 나에게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며 숭고한 업적이다. 민주주의라는 정의로운 의도로 촉발되어 총탄으로도 무릎 꿇게 할 수 없었던 시대의 아픔이다. 지만원의 만행은 어쩌면 저 운동의 숭고함을 해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김군’을 찾기 어려웠던 것은 지식인 대학생으로 촉발된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출신조차 불분명한 넉마주이들을 기록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숭고함은 그들의 죽음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였다.
영화는 사진이라는 한순간의 기록으로 남았던 인물들을 하나씩 카메라 앞으로 소환한다. 그날의 두려움을 기억하는 평범한 이들의 회고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숭고함이 차마 끼어들지 못한다. 대신 옆에 있던 사람이 죽어가는 두려움, 가족이 갑자기 돌아오지 못하는 불안함,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담겨있다. ‘우리 사회에서 5.18은 신화로 박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80년 광주의 거리로 나왔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복원된 5.18 민주화 운동은 거대한 정치적인 담론도, 숭고한 신화도 아니었다’는 감독의 말은 아마도 숭고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 속 ‘김군’을 기억하지 못한 우리 시대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북한군을 논하는 저 저열한 인간들을 보면 숭고한 신화로서의 민주화운동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조금은 성급하게도 느껴지지만, 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은 그날을 신성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기억하는 데 있고, 그 기억은 민주주의라는 소명 의식을 가진 이부터 피 흘리는 시민들로 분노한 평범한 이들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김군>은 그 기억의 확장을 시도하는 소중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