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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변의 고급분투기 Jul 06. 2024

[영국법 소개하기] 신탁과 형평법상의 구제수단 제1편

"그래서 도대체 형평법이 뭐야?" - 형평법의 개념과 연원 알아보기



19세기 형평법 법원(Court of Chancery)을 묘사한 그림

안녕하세요. 계약법 소개하기 편에 이어, 한국법을 공부하셨던 분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형평법(law of equity, equity) 및 신탁(trusts)에 대한 포스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포스팅을 위해 참고할 서적은 형평법과 신탁의 기본서 중 바이블과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Alastair Hudson의 <Equity and Trusts> 입니다.  분량이 꽤 방대한데 A. Hudson   썰과 방설이 꽤 많습니다.


영국법의 상당 부분은 500년,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체계가 유지된 채 발달해 온 것이라 역사썰도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고 심도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맛깔나게 기술하는 것은 제 능력 밖인지라 저는 간략히 형평법의 개념에 대해 소개하고, 이어 형평법의 척추와도 같은 신탁법리에 대해 주로 포스팅을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막판에는 형평법상의 구제수단(equitable remedies)도 기본서에 소개된 내용에 한해 짤막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전 계약법 소개하기 포스팅과 같이, 되도록 영국 법률 용어는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원래 용어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물론 처음 소개할 때에는 제 생각에 가장 유사한 용어로 바꾸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 <Equity and Trusts> - 이하에서 'Hudson 저', 'Hudson은~', '기본서'

* Equity - 'Equity', 'Equity law', '형평법', '형평상의~'


형평법이 뭐고 왜 중요한 것인가

영미법에는 'Equit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형평법'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한국법에는 없는 다소 낯선 개념입니다. 대충 왜 존재하는 것인지, 어떠한 의미인지 검색을 해 보면 '문리적인 법 해석을 넘어 상황에 맞게 유연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법 체계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문언'이나 '문리적'인 것을 넘어 유연한 것이라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Equity가 무엇인지 정의내리기 전에, 우선 Equity의 기능이 무엇인지 풀이를 해야될 것 같습니다.  <Equity and Trusts>에서는 Equity를 "법체계가 규칙 정립에서 요구되는 법적 확실성을 유지하면서도 개별 상황에서 공정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추는 수단(the means by which a system of law balances out the need for certainty in rule-making with the need to achieve fair results in individual circumstances)"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으면

궁극적으로 보통법(common law)가 엄격한 규칙성을 지향한다면, 형평법은 천편일률적인 판례법을 포함한 보통법의 적용으로 인해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한 구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경우, 구체적 타당성이 담보되도록 기능하는 법체계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약간 복잡하죠?  저도 쓰면서 무슨 말인지 잘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Equity / 형평법은, 연원이나 주된 법리를 설명하기 보다는 신탁법과 같이 Equity의 원칙들이 현현하는 구체적인 형태 또는 판례법에서의 Equity 적용 사례를 살펴봐야 이해가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Hudson은 기본서에서 '형평법은 양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라고 여러 번 말하고 있는데, 민법 시간에 배운 신의칙이 연상되었습니다. 민법 제2조에 신의칙이 있고, 구체적인 법리와 예시로서 선행모순의 원칙(estoppel)이나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이 적용되는 방식이 당사자가 '양심상(in good conscience) 행할 수 없는 행위'를 차단하는 형평법의 작동 방식과 유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Conscience is the key concept at the heart of equity.  Equity, then, is that part of English civil law which seeks either to prevent any benefit accruing to a defendant as a result of some unconscionable conduct or to compensate any loss suffered by a claimant which results from some unconscionable conduct, and which also seeks to ensure that common law and statutory rules are not manipulated unconscionably."
- Alastair Hudson, <Equity and Trusts>, Chapter 1 (The Nature of Equity)


그렇다면 법원은 형평법을 도대체 어떻게 적용하는 것인가요?  신의칙처럼 일반 원칙의 적용을 통해, 법원이 개별 사안에서 사실관계와 맥락을 고려하여 재량을 행사하는 것일까요? Hudson 저에 따르면, 이러한 '일반 원칙'으로 도피하는 것마냥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실무상 형평법은 특정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실체법상 또는 절차법상의 개별 원칙 및 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법원이 일반원칙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과 달리 매우 제한적으로 재량만을 허용합니다.


형평법이 양심(conscience)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알겠는데, 신탁법과는 무슨 상관인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형평법은 구체적인 경우에서 보통법(common law)나 성문법상의 규칙(statutory rule)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 불공정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법원칙이라고 하기 보다는, 개별 상황에서 법적 논증을 통해 도출되는 결과를 수정(rectification of legal justice)하는 기술적이고 실체법적인 성격의 규칙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Hudson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형평법상의 법원칙은 신탁(trust)법 이론입니다. Resulting trust(복귀신탁)을 다룬 Westdeutsche Landesbank v Islington LBC라는 귀족원 사건에서 Lord Browne-Wilkinson은 다음과 같이 판시하였습니다:


Equity operates on the conscience of the owner of the legal interest. In the case of a trust, the conscience of the legal owner requires him to carry out the purposes for which the property was vested in him (express or implied trust) or which the law imposes on him by reason of his unconscionable conduct (constructive trust).
- Westdeutsche Landesbank v Islington LBC [1996] AC 669


결국 풀어 말하자면, 신탁법의 기본 전제는 법적 권리자가 보통법에 따라 자신에게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평법에 따라 수익적 권리자와의 약속을 준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형평법의 역사 및 발달 과정

이 공간에서 형평법의 연혁과 발달 과정을 비롯하여 보통법과의 관계를 논의하기엔 제 전문성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Hudson 저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형평법의 기원은 노르만 족이 11세기에 잉글랜드를 침공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066년의 침공 이후 윌리엄 1세를 필두로 하여 외세 민족이 잉글랜드 본토를 점령하며 새로운 법제도를 정비하였고, 잉글랜드는 처음으로 왕국 전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 - 이른바 보통법(common law) - 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다만 보통법을 적용할 때 불공정하거나 부정의한 결과가 발생할 경우 백성들은 왕에게 바로 청원을 제기(petition)할 수 있었고, 왕이나 왕의 대리인이 구체적인 사건의 사실관계에 따라 내리는 결정은 법원의 판단 내지 판결을 번복하거나 수정하도록 함으로써 왕권의 유지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왕에게 직접 청원을 제출하는 사건이 늘어나자, 'Lord Chancellor'라는 직책이 창설되었습니다.  주로 한국에서는 대법원장이라고 번역되지만, 대법원의 장으로 판사직을 역임하는 사람이 아니라 법무를 담당하는 대신/재상 중 가장 높은 직책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ord Chancellor의 권한이 증대되며 절차 내에서 더 폭넓을 재량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형평법상의 절차를 주재하는 이들이 궁극적으로는 엄격한 법리나 법원칙(특히 보통법의 선례)에 구속되지 않은 채 구체적인 사안에서 피고의 양심(conscience)를 탐구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형평법원 초기에는 이와 같이 Lord Chancellor들이 선례를 무시하고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왕왕있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신탁법과 같이 이러한 '형평에 기반한' 법적 판단들이 더욱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보통법과 형평법이라는 이원화된 체계 하에 소송을 제기하고자 하는 원고는 자신이 제기할 청구가 보통법에 기반한 것인지, 형평법에 기반한 것인지 택일하여야만 했습니다.  만약 보통법에 기반할 청구를 형평법원에 제출하는 경우, 청구 각하의 판결이 내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1873년 사법부법(Judicature Act 1873)이 통과되며 해결되었습니다.  형평법을 다루는 형평법원(Court of Equity)과 보통법에 기반해 사건을 해결하된 보통법원(common law courts)가 통합되었고, 원고들은 단순히 고등법원(High Court)에 소를 제기하면 소송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재에도 고등법원의 Chancery Division(형평법정)이 신탁과 재산법과 관련된 사건을 담당하고, 고등법원 왕좌부(King's Bench Division)가 계약해석이나 불법행위법과 같은 전통적으로 보통법의 영역에 속한 사건을 담당하는 분업 형태에 보통법과 형평법 간 실무적 구분이 잔존한다고 할 것입니다.


1873년 사법부법 통과에 따른 영향

Hudson 저에서는 1873년 사법부법으로 인해 보통법과 형평법 간의 실무적인 구분(practical distinction)이 사라졌지만, 지적 또는 개념적 구분(intellectual distinction)은 여전히 남아있게 되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가령 사법부법 제25조는 형평법과 보통법 간 상충되는 내용이 있을 경우, 형평법이 우선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Generally, in all matters not hereinbefore particularly mentioned in which there is any conflict or variance between the rules of equity and rules of common law with reference to the same matter, the rules of equity shall prevail." (일반적으로, 위 조항에서 달리 규정하지 않은 모든 사항에 있어 어느 문제에 대해 형평법상의 규칙과 보통법상의 규칙이 상충되거나 그 내용에 차이가 있을 경우, 형평법 규칙이 우선한다.)
- Section 25, Supreme Court of Judicature Act 1873


사법부법은 형평법이 법원의 판례에 따라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정하지는 않았으나, 사법부법 제정 전후로 형평법 또한 선례구속의 원칙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형평법과 보통법 간의 구분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왔으며, 법적 쟁송을 제기하고자 하는 자가 형평법상의 구제수단(remedies available under equity)과 보통법상의 구제수단(remedies available at common law)을 활용할 수 있게 된 이유입니다.


보통법과 형평법상의 구제수단의 차이

보통법과 형평법 간에 구분이 있다는 점 이제 명확히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기 전에, 두 체계를 통해 원고가 구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법은 주로 손해(loss)에 대한 배상을 구할 때 근거가 되는 법체계고, 가처분 등과 같이 법원의 재량이 중요한 사안에서는 형평법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형평법의 구체적인 내용인 형평법의 법원칙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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