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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변의 고급분투기 Jul 19. 2024

[영국법 소개하기] 불법행위법 제1편 - 인과관계

Causation


안녕하세요.  계약법과 신탁/형평법에 이어 불법행위법에 대한 정리글 연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불법행위법(Torts)은 SQE 1에서 가장 까다로운 과목 중 하나였는데, 그 이유는 민법 내 법정채권 부분과 유사한 개념도 많았지만 낯선 개념도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본서는 널리 알려진 교과서 중 하나인 <Clerk and Lindsell on Torts>를 참고하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내용은 Clerk and Lindsell 저를 주로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간혹 가다 중요한 판례가 나오는 경우 사실관계 및 ratio decidendi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드릴 수 있지만, 위 기본서를 얼개로 잡아 불법행위법을 제가 이해하는 대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영국법 중 불법행위법, 그중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불법행위법의 정의나 기본 개념, 다른 분야의 법들과 구별하는 개론 부분부터 시작함이 마땅하지만, 너무 지루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정리하다가는 약 100편의 글을 작성해야 불법행위법을 전부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 연말까지 빡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룰 주제는 (기본서와 일맥상통하게) 아래와 같습니다.


I. 인과관계 개론, Factual causation (사실적 인과관계)

II. Loss of a chance (기회상실로 인한 손해배상),

III. Causation in law (법적 인과관계)

IV. Remoteness of damage (손해의 근접성법리)


I. 인과관계 개론


영국 불법행위법 (Tort law, 이하 Tort law나 Tort라고 하겠습니다)에서 원고(claimant)는 피고의 위법한 행위(wrongdoing)로 인하여 실제로 손해(actual damage)를 입었다는 점을 입증하여야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예외 또한 존재하지만...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불법행위에 기한 소송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한다는 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실 것 같습니다. 특히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와 관련된 소에 있어 실무적으로는 인과관계가 가장 많이 문제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과관계'는 과연 무엇일까요?  법학도로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이것이 흔히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인과관계'와는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불법행위법에서 인과관계는 특정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즉 귀책을 묻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인과관계와 관련된 주요 개념들을 짚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개념은 사실적 인과관계(factual causation)기회의 상실(loss of chance)입니다. 사실적 인과관계는 피고의 불법행위와 원고의 손해 간의 물리적인 연관성(physical connection)을 규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경우 법원이 과학적 증거를 살펴보아 판단을 내리게 되고, 사건 간 연결고리를 정확히 특정하는 것이 어려울 경우 (정책적인 고려 사항을 반영하여) 불법행위의 손해에 대한 실질적인 기여(material contribution)가 존재하였거나, 실질적인 해악이 발생할 위험의 증가(material increase to the risk of harm)가 있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인과관계 성립 여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특정 상황에서는 확률적인 분석을 토대로 인과관계 성립 여부에 대한 판단을 '원고가 위험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었을 확률'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러한 기회의 상실 법리가 적용되는 국면은 원고가 순수하게 금전적인 손해(purely financial loss)를 입게 되었을 때로 제한되며, 자세한 내용은 추후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개념은 법률적 인과관계(causation in law)입니다. 만약에 손해를 야기한 사건이 여러 가지인 경우, 즉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인 경우 법원은 과연 피고의 불법행위를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피고의 행위로 인해 원고가 병원에 실려가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법원은 어떠한 사건이 원고가 입은 손해의 원인인지를 파악하여야 하는데, 보통법은 매우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여 후속 사건들이 새로운 개입 행위(novus actus interveniens)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개념은 손해의 근원성(remoteness of damage)입니다.  한국에서 민법을 공부할 때에는 행위와 손해 사이에 의미 있는 연결고리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상당인과관계' 판단 안에서 따져보았던 것 같습니다. 영국법의 경우 remoteness 판단은 행위가 결과로 이어졌는지 실제로 판단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손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만한 행위인지를 살펴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원성을 따져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법에 따르면 피고는 원고가 입을 손해가 예견가능(foreseeable)할 때에만 과실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합리적인 행위자는 예견 가능하지 않은 결과를 회피하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입증책임(burden of proof)입니다. 불법행위를 청구원인으로 제기하는 손해배상청구는 대다수의 경우 원고(claimant)가 입증책임을 부당합니다. 이때 기준은 으레 민사소송에서 그렇듯이 balance of probabilities입니다. 즉 원고가 '피고의 불법행위가 원고가 주장하는 손해를 끼쳤을 가능성이 그렇지 아니하였을 가능성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사실적 인과관계


앞에서는 매우 미약하게나마 Clerk & Lindsell 저에서 소개하고 있는 불법행위 인과관계의 주요 개념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각 구성요소를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but-for" test

인과관계 입증의 첫 단추는 'but-for test'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보다 영미법을 깊게, 전문적으로 공부하신 분들이 최대한 한국어로 적확한 표현을 찾아 번역하셨겠지만, 저는 그대로 but-for test라고 번역하지 않고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가장 유사한 개념은, 조건적 인과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ut-for test는, 비유를 하자면 깔때기로 인과관계에 있어 전혀 무관한 요소는 일거에 제거하는 장치입니다. 원고가 주장하는 손해가 불법행위 a가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 (whether the damage which the claimant complains would have occurred 'but for' the negligence of the defendant)을 입증한다면 but-for test를 통과하게 됩니다.


But-for test에서 걸러진 사례로는, 남편이 비소 중독으로 병원에서 사망한 후, 의료진이 치료에 있어 과실을 인정하자 원고가 Fatal Accidents Act에 기해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였으나 법원이 적시에 적절한 치료를 받았더라도 비소 중독으로 인하여 남편이 사망하였을 것이라고 보아 인과관계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본 Barnett v Chelsea and Kensington Hospital Management Committee 사건이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내용으로 돌아가자면, 영국법(다른 나라 법도 마찬가지겠지만)에서 인과관계를 따지는 이유는 행위자에게 법적인 귀책을 묻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판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but-for 요건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But-for test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영국 법원은 사실관계에 비추어 But-for test가 도저히 충족되지 않을 것 같은 일부 경우에도, 피고의 행위에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이는 경우에 인과관계를 인정하기도 합니다. Kuwait Airways Corp v Iraq Airways Co 사건에서는 쿠웨이트 침공 후 이라크 정부가 항공기 10대를 취하여(conversion 정확히 한국법에 대응되는 개념은 없지만, 타인인 소유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양 사용하거나 이득을 취하는 불법행위를 지칭합니다) 피고에게 사용하도록 하게 하자, 원고가 불법행위에 기한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피고는 영국법상 불법행위가 적어도 손해의 필요조건이 되어야 하므로, 원고가 행위가 없었다면 손해 또한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이라크 정부가 항공기를 취한 후 그대로 보유하거나 다른 정부 기관에 이전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원고가 '만약 피고가 원고의 재산을 취한 후 사용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원고가 소유권을 상실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귀족원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원고는 but-for-test를 충족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러한 취지의 판결을 내리며 Lord Hoffman은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는 데 있어 단일한 인과관계 심사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며, "법적 책임(liability)의 문제와 인과관계의 문제(causation)를 분리하여 볼 수 없다"라고 판시하였습니다.

"the court may treat wrongful conduct as having sufficient causal connection with the loss for the purpose of attacting responsibility even though the simple 'but for' test is not satisfied."

Lord Hoffman, Kuwait Airways v Iraq Airways


제2편에서는 위와 유사하게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문제 되는 인과관계의 '불확실성(uncertainty)' 문제로 넘어가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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