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변의 고급분투기 Sep 11. 2024

[영국법 소개하기] 불법행위법 2편 - 주의의무(1)

Duty of care에 관하여

불법행위법에 대해 아주 좋은 책을 확보함에 따라 정상적인(?) 순서대로 글을 계속 연재하겠습니다. McBride & Bagshaw의 <Tort Law (7th ed.)>인데, 저자 분들의 의견이 강력히 들어가 있지만 매우 이해하기 쉽게, 또 거시적인 관점으로 초심자에게 불법행위법 개론을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기본서 초반에 '불법행위법에 대한 고찰' 및 영국법상 사람에 대한 불법행위인 trespass against the person(가령 battery, assault, false imprisonment)는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제가 관심이 없어서... 과실행위에 기한 불법행위청구(claims in negligence)의 가장 기본 요건인 duty of care(주의의무)에 대해 먼저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글을 쓰면서 미래의 시간에 이 글을 읽을 독자가 관심이 없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하면서 쉬는 시간을 쪼개 작성하고 있는데... 도저히 불법행위법에 대해 재미있게 쓸 능력이 되진 않네요. 


I. 주의의무란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이하 "negligence")는 당사자 간에 존재하는 주의의무를 위반하게 되어 발생하는 불법행위의 유형이고, 본질적으로 계약관계에 의해 발생하지 않으며(non-contractual) 형평법(non-equitable)에 기해 발생하는 법률관계도 아닙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저도 써놓고 잘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원고가 피고에게 negligence에 기해 소를 제기하기 위해 원고는 피고가 원고에 대해 부담하는 주의의무(duty of care owed to the claimant)를 위반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여기서 피고가 다른 어떤 제3자가 아닌 원고에 대해 주의의무를 부담하여야 한다는 점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단지 원고에게 부담하는 주의의무라는 점으로는 불충분하고, 당해 사건에서 문제되는 주의의무의 보호법익이 무엇인지 또한 문제됩니다.  즉 만약 주의의무를 위반하여 피고가 어떠한 손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주의의무가 유사한 종류의 손해를 보호하기 위해 설정되는 것일때 불법행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if the duty of care was geared towards protecting the defendant from suffering that kind of harm, that kind of loss). 가량 순수재산손해(purely economic loss)의 경우 영국법에 따르면 불법행위자와 피해자 간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가 존재할 경우에만 불법행위자가 주의의무를 부담하게 됩니다.


II. 주의의무는 언제 도출되는지에 대한 열띤 토론

그렇다면 claim in negligence가 성립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은 주의의무가 존재하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이때 영국법에서는 꽤 오래 지속되어 온 난제가 있었습니다.  기본서의 저자들은 이것을 '주의의무 존부를 판별하기 위해 일반적인 심사기준이 존재하는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토론이 중요한 이유는? 수험자 입장에서는 딱히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일반적인 'test'가 존재하더라도 특정 사례에서 대법원이 주의의무를 인정하였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판례를 외워야 하고, 일반적으로 적용될 만한 기준이 없다고 가정할 경우 더더욱 개별 판례를 공부하여야 하기 때문이죠.  


우선 영국법은 Donoghue v Stevenson (1932) 사건에서 논쟁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대법관인 Lord Atkinson은 'neighbour principle'이라고 불리게 되는 내용을 처음으로 설시하는데, 이 원리란 한마디로 '행위자의 행위로부터 직접적이고 근접한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persons who are so closely and directly affected by my act that I ought reasonably to have them in contemplation as being so affected...")에게 행위자가 주의의무를 부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저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위 내용만으로는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한 불법행위의 태양을 하나하나씩 따져서 주의의무가 존재하는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례를 일반화하여 어떠한 일반적인 '주의의무가 성립하는 관계'를 도출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neighbour principle은 후에 Caparo Industries Plc v Dickman (1990) 사건에서 (당해 법관의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자가 피해자에게 주의의무를 부담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굳어졌습니다.


마침내 Robinson v Chief Constable of West Yorkshire Police (2018) 사건에서 주의의무 존부가 문제되었는데, 주된 쟁점은 경찰관이 마약상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보행자를 밀쳐 넘어뜨리지 않을 주의의무를 부담하는지 여부였습니다.  Lord Reed 대법관은 Caparo 기준을 비판하며 주의의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Caparo 사건의 의의는 모든 사건에 대입하여 주의의무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적용할 수 있는 단일한 기준이 있다는 주장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신 "보통법의 주된 특징인 점진적이고 기존 사례와의 유비적 논증을 통해 판정례를 발달시키는 접근법을 택하는 것"이라고 판시하였습니다.


즉 위 Robinson 사건에 의하면, 법원이 앞에 놓인 사건에 피고가 원고에게 주의의무를 부담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포괄적이고 모호한 Caparo 기준이나 neighbour principle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이전의 판례법을 탐구하여 과연 법원이 동일한 사례를 판단한 바 있는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III. 주의의무 존부에 대한 판례의 태도

1. 조금 더 쉽게 파악하자! 도식화된 주의의무 존부 기준

다소 복잡해진 현재 영국 판례의 태도를 정리하자면, 우선 주의의무 존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i) 작위 또는 부작위가 문제되는지, 그리고 (ii) 손해의 성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간단히 도식화된 내용에 따르면,

- 작위행위가 신체적 손해(physical injury)로 이어졌을 경우: 피고의 행위가 원고의 신체적 부상으로 이어질 것이 합리적으로 예견가능(reasonably foreseeable)했다면 주의의무가 있음

- 부작위신체적 손해로 이어졌을 경우: 피고가 원고를 신체적 손해를 입지 않게 하여야 할 특단의 사정(special circumstances)가 있을 경우 주의의무가 있음

- 작위행위가 정신적 손해(psychiatric illness)로 이어졌을 경우: 피고의 행위로 인하여 원고에게 정신적 질환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 합리적으로 예견 가능하였고, 피고의 행위와 원고의 손해가 충분히 근접하였을 경우(there was a sufficient degree of proximity between these actions and C's illness) 주의의무가 있음

- 작위행위가 재산상 손해(property damage)로 이어졌을 경우: 피고의 행위가 원고의 재산상 손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합리적으로 예견가능했을 경우 주의의무가 있음

- 부작위행위가 재산상 손해로 이어졌을 경우: 피고가 원고로 하여금 재산상 손해를 입지 않게 하여야 할 특단의 사정이 있을 경우 주의의무가 있음

- 작위행위가 순수재산상손해(pure economic loss)로 이어졌을 경우: 원고와 피고 간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이 있었고, 이는 마치 피고가 원고의 재산상 이익을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것에 상응할 정도(assumed as a responsibility for economic welfare)일 경우 주의의무가 있음.


보시다시피 꽤 복잡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부작위에 대한 과실불법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피고가 원고에 대한 무언가를 부담할만한 사정이 있어야 인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수준의 도식화된 형태도 꽤 일반적이며, Lord Reed 대법관이 Robinson 사건에서 지적하였던 바와 같이 법원은 상황별로 '정의와 합리성'을 고려하여 주의의무 존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다음 주의의무 II 편에서는 이러한 요소와 함께 나머지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영국법 소개하기] 불법행위법 제1편 - 인과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