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를 보러 왔던 친구를 역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차를 돌려 근처 수목원을 들렀다. 내내 번잡하고 시끄러웠던 마음을 달래는 방법은 역시 걷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대로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이른 시간임을 알려주려는 듯 텅 빈 주차장에 외로이 주차를 해 두고, 나는 가만히 수목원을 걷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머릿속과 마음에 조금씩 안정이 찾아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헐벗은 나무와 말라버린 풀들 사이에 조금은 쓸쓸한 듯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길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습지가 얼어 겨울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수목원은 중간에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약해빠진 몸뚱이는 그것마저 숨차다고 난리였지만, 한참을 올라가서는 왠지 모르게 편해졌다. 가파른 등산코스는 아니지만 마스크 안에서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붙잡고 파란 하늘에 걸린 나무 끝을 보고 있으면 숨을 뱉지 않아도 후련해졌다. '오길 정말 잘했다.' 혼자 수목원에 오는 것을 예전엔 참 좋아했었는데. 다치길 여러 번. 나는 그 행복을 잊고 있었다. 아침에 간 수목원은 너무 조용하고 맑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혼자 누렸다. 새들의 노랫소리도 춤추는 나뭇가지들의 연주도. 다행히 날이 따뜻하고 맑아 파란 하늘까지 만났으니 이보다 설렐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혼자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웅-' 반가운 진동이 느껴졌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얼마 만에 연락이 온 건지 기억도 안나는 친구의 연락이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대뜸 중식이라는 밴드의 '나는 반딧불'을 공유했다. 원래 그 밴드의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그 밴드의 다른 곡을 공유했다. '마 아직 기다리라.'라는 노래였다. 그리고서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냉큼 수목원을 담은 사진들을 친구에게 보냈다. 그리고선 '장개는 갔니' 하고 물었다. 친구는 '넌 시집은 갔니'라고 하더라. 괜히 멋쩍어 우리는 그냥 웃었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내가 혼자 자취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노래를 하는 어플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이 친구랑은 시도 때도 없이 통화하고,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고, 친구는 못 이기는 척 노래를 불러줬다. 친구가 사는 곳과 내가 태어나 나고 자란 곳이 같았다. 우리는 꽤 많이 친해졌다. 하지만 아직 만나 본 적은 없다.
이 친구를 알게 되고 어느 날, 나는 직업의 특성상 밤늦게 퇴근을 항상 했었는데 그때는 전철역에서부터 자취하던 방까지 15분에서 20분을 걸어가야 했다. 그날 이상하게 역전에서부터 따라오던 발소리가 있었다. 처음엔 같은 방향이겠거니 했고, 구청을 지나서 가는 길이라 큰길에는 사람이 많아서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이상하게 너무 바짝 걸음 소리가 붙어왔고, 쎄한 기분에 먼저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에 멈추면, 그 발소리도 함께 멈췄다. 구청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고 나서는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야 했는데, 코너를 돌아도 그 소리가 따라왔다.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카페 앞에서 카톡을 하는 척 카페 통유리창으로 비치는 사람을 곁눈질로 보았다.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남자였다. 그 남자는 내가 멈춰서 핸드폰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멈춰서 서있었다. 마치 내가 가지 않으니 가지 않는 것처럼. 기분이 묘했고, 나는 다시 조금 걸어가다 이내 걸음을 멈췄다. 카페를 지나고 식당 몇 개를 지나면 편의점이 나왔다. 나는 그 앞에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냅다 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자신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고 했다.
- 여보세요?
- 어 왜.
- 어? 야! 나 어 노래 불러줘!
- 야, 야 끊어. 나 술 마시는 중이라. 빨 드가.
- 야.. 그.. 끊지 마!
- 뭔데. 무슨 일 있나? 니 왜 그러는데.
- 토독토독( 나 누가 따라와. 내가 서면 지도 서고 내가 가면 지도 따라와..)
- 야 니 무슨 일 있냐고
- 문자 봐
- 잠만, 아... 야 니 이어폰 끼고 있나, 이어폰 빼라.
- 어?
- 이어폰 빼라고. 바보야. 스피커폰으로 받아.
- 어? 어어( 이어폰 빼고 스피커폰으로 바꿈)
+ 내가 너무 불안해해서 노래 쪼끔 불러줌.
- 여보세요? 다 왔어? 어디쯤이야?
- 어? 어어 나, 어 다와가.
- 어딘데. 편의점 지났나?
- 어? 어어 지에스 지나고, 이제 골목 입구 다 왔어.
- 아 그래? 그럼 데리러 나갈까?
- 어? 뭐라고? (속으로 구미에 있는 놈이 어떻게 온다는 거지? 생각함)
- 편의점 지났다며? 거의 다 왔네! 내가 내려갈까?
- 아냐~ 나 다 왔어. 괜찮아!
- 잠시만 기다려 내려갈게.
-어? 아냐 아냐. 나 정말 괜찮....
×× 띠리릭.
정말 절묘한 타이밍에 2층에서 젊은 남자가 내려왔고, 반지하가 있는 건물이라 1층으로 올라가 돌았을 때, 나를 따라오던 남자가 나를 째려보다가, 2층에서 내려오는 그 남자를 보고 냅다 도망쳤다. 2층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갸우뚱하고 나랑 나를 따라온 사람을 번갈아 보다 그냥 밖으로 나갔다. 나는 3층으로 뛰어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잠그고,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친구는 가만히 듣고 있더니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친구가 말했다.
- 다 울었나. 그만 울어라. 고생했다. 쉬어라. 나는 술 마시러 간다 인제!
- 엇어... 고마워
- 그래, 놀랬제. 괜찮다. 인제. 쉬어라. 내 술 마시러 간다. 안녕.
미션을 끝냈다는 듯 친구는 칼같이 안녕 인사를 하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이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알코올성 치매인 것 같다며,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기 자신이 너무 멋있다고 했다. 우습지만 몇 번을 이야기해도 그날의 일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 생생해서 나는 오랜만에 또 생각난 이 일을 이야기했고, 친구는 또 새로 듣는 이야기인 듯 신기해했다. 자기 자신이 멋있다 생각한다며. 아무튼 그 일은 고맙고 멋있긴 했으니.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다음날 그 친구에게 나는 물었었다. 편의점 지나는 줄 어떻게 알았냐고. 그때 친구가 그랬다.
"야, 니 바보가. 편의점 없는 동네가 어딨어. 그냥 해본 소리지."
앞으로도 몇 년이 더 지나도 잊히지 않을 일일 듯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고마울 일이다.
어쨌든 너무 반가운 마음에 통화를 했고, 친구는 예전처럼 내게 노래를 불러줬다. 그냥 갑자기 불러달라는 얘기에도 거절하지 않고 자다 일어난 목소리로 노래를 해주는 게 너무 웃기고 고마웠다. 무섭고 속 시끄러운 일이 있을 때, 이 친구의 노래를 들으면 그날 겪었던 일 때문인지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가셨다.
한참을 통화하다 통화를 종료했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운전해야 하니 전화하라는 한마디를 남겨놓고. 운전대를 잡자마자 친구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운전에 집중해야지. 마. 혼날래.'
문자를 할 수 없으니 그냥 바로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전화를 받고, 집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대뜸 물어보더니 자신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내가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가 끝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별 뜻 없는 얘기들을 늘어놓았지만, 괜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서른다섯이 되어도 장가를 못 가면 국제결혼이라도 해야겠다고 하는 친구에게 그때도 장가 못 가고 나도 시집을 못 가면 내한테 오라는 말을 했다. 잔뜩 비웃을 줄 알았는데 지는 정말 좋다고 했다. 그리고 우린 한참을 웃었다.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도, 오랜만에 혼자 걸은 수목원도 참 기분 좋았다. 시끄러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그 평화도 아주 잠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