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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Apr 10. 2022

검은 바다

검게 빛을 잃은 바다가 보고 싶다.


유난히 그런 날이 있다. 검게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그저 까만 바다가 보고 싶은 날. 출렁이는 바다가 나를 집어삼킬 듯한 소리를 내고 겁을 줘도 괜히 그 바다가 포근하고 그 품에 달려들고픈 날. 내게 돌아가라 매질하는 듯한 철썩임에도 속을 다 털어놓으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가만히 마음으로 온갖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 날. 무기력한 하루들이 나를 까만 바다가 보고 싶게 한다.


요즘의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글을 쓰는 것도 아니오, 사진을 찍는 것도, 산책을 하지도, 책을 읽지도 않는다. 그렇게 듣던 음악도 거의 듣지 않는다. 가만히 누워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마음이 빈 장난만 가득한 그런 영상들을 보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게 없는 것 같다. 참 무기력하다.


근래 그렇게 좋아하던 수도권을 뒤로하고 원래 살던 고향으로 이사를 내려왔다. 엄마 아빠의 품에서 벗어나 홀로 돌아온 고향은 텅 빈 집 같았다.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쁜 친구와, 바쁜 친척들. 어디로 가야 누구를 만날 수 있는지, 반가운 얼굴은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고 10년이 훌쩍 지나 아는 곳도 없는 이곳에 홀로 내려왔다. 다시 새 출발을 하겠다는 같잖은 다짐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내려만 오면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고 싶은 것들을 다시 채우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기대했다.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대한 걸까. 역시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불안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완벽히 아무것도 모른다. 이곳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솔직한 생각으로 나는 이제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치료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치료로 지치기도 하고, 이제는 처음 계획했던 기간의 치료가 끝날 시점이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치료를 하지 않고, 더 이상 약으로 버티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오만이었다. 이사를 내려오는 것을 준비하고, 이사를 마치기까지 잔뜩 긴장한 채로 일을 마무리했고, 정리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아프기 시작했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홀로 빈 집에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그리고 며칠 전 서울을 다녀왔다.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올라간 서울에서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검사도 않고 다음 달 약을 처방해 주셨다. 그다음 달에 다시 만나자는 이야기와 함께. 그래서 너무 멀리 이사 온 탓에 매달 올라오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두 달치를 처방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겠지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번이 3차, 다음 달이 4차. 5차랑 6차도 4차까지 복용 후에 다시 오면 그때 처방해 주시겠다고 했다. 약을 복용하는 게 힘들지는 않냐는 가벼운 질문과 함께.


너무 힘들다. 사실은 너무너무 힘들다. 약을 복용하면 약을 먹는 것 하나만으로 벅차다. 온 체력이 한 번에 사라지고 온 기운이 한 번에 빼앗기는 느낌이다. 살아있던 오징어가 칼집 한 번에 흐물텅해지는 것처럼. 나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덜 힘든 게 맞으니까. 몇 차까지 약을 복용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언제쯤이면 괜찮아지는 건지. 그렇게 약을 받아 들고 다시 전철을 타고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고향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으면 다시 일을 시작하고, 제자리를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과 앞으로의 계획에 더 이상 병원과 치료는 없었다. 그것들이 뒤를 따라오는 순간 모든 약속은 어긋날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한 계획에 그것들은 이미 끝나고 없었져야 했다. 분명 감사한 일이긴 하다. 암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했고, 치료를 하고 용종의 수가 거의 줄어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다. 애초에 선생님이 완치는 없다고 하셨으니까.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용종이 거의 다 사라지고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남았고, 완치도 가능할 것 같다는 말에 너무 큰 기대를 했나 보다. 내가 내일을 계획하다니. 이렇게 실망하게 될 것을 알고, 이렇게 불안해질 것을 알면서도.


나는 불안이 과해지면 까만 바다를 그리워하곤 했다. 지금 내가 그 까만 밤바다가 그리운 것을 보니 상당히 불안한 것이 맞나 보다. 나는 내일 무얼 할 수 있을까. 내일은 아프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까. 내일은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일은 괜찮아야만 한다.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니까. 더는 그 시작을 미룰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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