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die Apr 10. 2022

너의 흔적 위에 덧칠을 한다.

마음에 덧칠을 한다. 빛을 잃고 색을 잃은 시간들에 슬며시 덧칠을 한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에는 아직 자신이 없어 옅어진 그림에 자꾸만 덧칠을 한다. 다 날아가 버리고 남은 색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다시 또 칠하고 칠한다. 덧칠한 그림은 점점 번지고 이전의 모습을 하고 있지 못한데도 그저 남아있다는 게 중요했나 보다. 아직 곁에 있는 것만 같은 그 작은 흔적들이 중요했나 보다. 얼마나 선명한지에 대해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그저 흔적 하나 붙들고 또 덧칠을 한다.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번진 색에 눈물을 끼얹은 채로 마르기만을 바란다. 언제고 다시 덧칠할 수 있게 곁에 많은 색들을 남겨두고.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차마 잊을 수 없었던 색이 다 바래져 버린 너의 흔적에 덧칠을 한다. 무의미한 것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반복해 덧칠을 한다. 조금만 더 곁에 희미하게라도 남았으면 하는 마음인가 보다. 참 우습게도 그렇게나 귀했나 보다. 살아오면서 흔적에 덧칠을 할 만큼 귀하게 여겼던 추억이 얼마나 될까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돌아 제자리다. 네가 아닌 추억과 흔적은 색이 바래져 희미해지다 못해 잊혀 가더라도 덧칠을 하고자 하진 않았다. 오히려 더 박박 지우려 애썼다. 번진 흔적마저 사라지길 기도했다. 하지만 너는 차마 지우지 못하고 번지더라도 내내 채우고 싶었나 보다. 덧칠을 해 예전 같진 않더라도 남겨두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나는 다시 너의 흔적 위에 덧칠을 한다. 꼼꼼하고 선명하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색을 잃지 않고 곁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검은 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