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건의 발단이 된 도화선을 일컬어 ‘트리거(Trigger)’라고 합니다. 원래 트리거는 총의 방아쇠를 일컫는 사격용어입니다. 저도 군대에 있을 때 총 좀 쏴 봤습니다만,(으쓱) 한번 쏜 총알은 절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는 굉장히 신중해집니다. 숨까지 참아가면서 말이죠.
UX라이팅에서도 마이크로카피 요소 중 ‘클릭 트리거(Click Trigger)’란 개념이 있습니다. CTA(Call to Action·목표달성버튼) 버튼 옆에 쓰는 짧은 글귀로 사용자의 클릭을 유도하는 역할을 해서 클릭 트리거라고 부릅니다. 버튼 옆 공간을 그냥 비워둘 수도 있지만, 공백으로 남겨두지 않고 마이크로카피를 활용해 사용자가 특정 액션을 취하도록 하는 것이죠. 사용자는 이 글귀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다음 스텝을 밟을지 말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 문구로 사용자 전환율이 높아졌다면, 그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용자의 마음을 움직였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클릭 트리거를 다른 말로 ‘결정적 한 마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고심한 한 마디의 말이 회심의 한방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돌아보면, 제 인생에서도 트리거가 작동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글쓰기를 무기 삼아 먹고살게 된 발단이랄까요? 누군가 저에게 어린 시절을 통틀어 가장 매진했던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전 “가족신문 만들기 방학숙제를 열심히 한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주제를 정하고, 콘텐츠를 구상하고, 글을 쓰고, 편집을 하는 전 과정을 진심으로 즐겼거든요.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상도 받고, 무수히 많은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글을 쓰는 사람의 속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칭찬이 칭찬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더 열정을 다해 만들었거든요.
물론 나쁜 트리거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주로 사회생활에서 들은 말들이었죠. 무시하는 말, 핀잔하는 말, 감정 섞인 말, 성내는 말, 불쾌한 표현, 성적 희롱의 말, 비꼬는 말, 차가운 말 등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말들입니다. 아마도 한 번 이상은 다 들었을 법한 말들이죠.
말에는 의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그냥 넘어가기에는 부적절할 때가 그런 경우죠. 제가 들은 말 중에 부정적 트리거가 작동했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퇴역 직후, 기자로 들어간 첫 직장에서 들은 말이었죠. 그건 바로 “넌 왜 A처럼 내 비위를 맞춰주지 않니?”였습니다. 그 말을 한 회사 대표님은 제가 “네, 알겠습니다”식의 응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주길 바랐습니다. 생글생글 미소를 장착한 말 그대로의 ‘비위’를 맞춰주길 기대한 모양입니다.
그 말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구의 비위도 맞추지 않겠다는 악에 받친 심리가 작용한 걸까요? 상대에게 좀 굽혀도 되는데 굽히고 싶지 않을 때가 많고, 부러지더라도 차라리 ‘뻣뻣하게 사는 게 낫다’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 비위를 맞춰주지 않니?”란 말이 트리거가 되어 제 삶의 일부분은 여전히 비위 맞추는 일 앞에서 거부감부터 듭니다.
Remember: every word counts
이런저런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트리거가 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선한 트리거로 작동했는지 나쁜 트리거로 작동했는지를요. 나쁜 트리거가 작동한 경우를 생각하다가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창원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제때 학비를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했던 그에게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OO야, 돈도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에 와? 빨리 꺼져!”라고 말이죠.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 후 마음속에서 악마가 생겼다”고 말입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만약에, 그때 그 선생님이 다른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말은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자극하고, 변화시키는 위력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신중히 방아쇠를 당기듯 말도 해야 합니다. 툭툭 던지는 말에 애꿎은 개구리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최근에 회사에서 들은 작은 일화가 떠오르네요.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사무실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위치가 애매해서 A와 B는 서로 다른 온도 차를 겪고 있었습니다. A는 춥고, B는 썩 시원하지 않았죠. 그래도 B는 냉방병에 걸리는 것보다 적당히 더운 편이 낫다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에어컨의 on/off 권한을 A에게 일임했죠. 다만, 너무 더울 땐 잠깐 손선풍기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A는 한 가지 불만이 생겼습니다. B가 더우면 덥다고 말하면 되는데 말없이 선풍기를 트는 모습이 무언의 눈칫밥으로 다가온 모양입니다.
이를 참고 있던 A는 어느 날, 선풍기를 트는 B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우면 덥다고 말해요. 혼자 얼굴 벌개서 그렇게 표정으로 얘기하지 말고요.” (이전 상황: B는 아무 말 없이 선풍기를 켰을 뿐. 굳이 덥다고도 춥다고도 하지 않음) 이 말을 들은 B의 심정은 ‘황당함’ 그 자체였습니다. 덥다고 말하지 않은 죄가 얼마나 크길래 이토록 표독스러운 말을 들을 일인가 싶었죠. 여기에 B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 정말 추운 것보단 더운 게 나아요, 정말이에요. 그리고 얼굴은 원래 홍조가 있어서 그래요 ㅠㅠ”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온도 차는 말본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A는 자신이 에어컨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모양입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조차도 눈칫밥으로 들을 만큼요. 반면 B는 어디까지나 진심이었습니다. 추위를 잘 탔고, 원래부터 홍조도 있었고요. 깻잎 논쟁 비슷한 에어컨 논쟁에서 A의 핀잔을 들은 B의 입장이 다소 억울해 보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A의 말본새가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진짜 속내는 숨긴 채, B를 탓하는 투로 핀잔을 주는 말을 꼭 했어야 한 걸까요?
말과 행동은 사실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일화지만, 이런 일은 직장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사소하게 시작해서 사소하지 않게 끝나는 경우도 다반사죠. 그런데 말이죠, 말과 행동은 사실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방아쇠에 올린 손을 언제 당길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요. 말이 의도를 품고 있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의지의 영역이고, 이해의 영역이고, 배려의 영역입니다. 신중히 말하는 만큼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죠.
달변가 윈스턴 처칠은 “말은 영원히 지속되는 유일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 내가 한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콕 박혔다면, 그 말이 긍정적인 트리거가 되었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말을 했다면,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언어의 마술도 부려볼 기회를 찾아봅니다. 말로 받은 상처는 말로 치유되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