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근한 정서를 지닌 서비스가 되려면
결론부터 말하면, 어떤 말의 형식을 빌리는 것 자체로는 친근한 정서를 지닌 서비스가 되기 어렵다.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는 친근할지 몰라도 친근한 정서까지는 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서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그런 감정을 갖게 하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의미한다. 그러니 '말의 형식을 빌리는 것'만으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치 않다. 게다가 특정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언어 외에도 다양한 조건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해요체를 써서 친근한 정서를 갖게 한다]는 말의 자간마다 생략된 수많은 과정이 이를 말해준다.
얼마 전, 일론 머스크 형의 자서전을 보다가 눈길을 끄는 문구 하나를 읽었다. 테슬라의 시그니처인 '팝업 손잡이' 관련 내용이었다.
운전자의 접근을 감지하고 손잡이가 마중 나온다니! 신기술과 아이디어의 조합에서 머스크는 사용자에게 친근함을 주는 경험(UX)과 디자인 사이의 접점을 발견했다. 여기에 디테일한 상황을 설정(마중 나오는 손잡이)하고, 의미를 부여(운전자와 차량의 유대감)해 사용자의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머스크 형이 팝업 손잡이를 보고 이해한 사고방식에 동의한다. 그래서 위 문구를 읽으면서 느낀 정서를 고스란히 UI에 투영해 보았다.
필시, '해요체'는 필요조건일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그래서 'UX' 관점에서 '친근함'에 대해 생각해 봤다.
우선, '친근하다'의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봤다.
[익숙하다]
1. 사귀어 지내는 사이가 아주 가깝다
2. 친하여 익숙하고 허물이 없다
1번은 사용자가 프로덕트가 사귀어 지내는 사이는 아니니 차치하고, 2번 '익숙하다'란 표현에 시선이 머물렀다. 말꼬리를 물고, 이번엔 익숙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익숙하다]
1. 어떤 일을 여러 번하여 서투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
2. 어떤 대상을 자주 보거나 겪어서 처음 대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상태에 있다.
3. 눈이 어둡거나 밝은 곳에 적응해 웬만큼 볼 수 있다.
그렇다. 친근함이란 '익숙한 데'서 비롯된다. 이 또한 하나의 가설이지만,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가 보면 결국 익숙함이란 이런 게 아닐까. 사용자가 예상 가능한 범주 내에서 예상 가능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 말이다. (설령 예상 가능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 과정은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가령, 깜짝 포인트 지급과 같은) 사용자가 처음 써보는 프로세스여도 뎁스와 뎁스 사이에 이동이 자연스럽다면 사용자의 학습 속도는 빨라지고, 곧 익숙함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UX라이팅 인사이트를
끄집어내면 사용자가 느끼는
편안함(사용성)은 UI 프로세스와 라이팅이
핏하게 맞아떨어질 때,
익숙한 정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최근에 한 UX라이팅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프로세스 안에 수많은 오류를 발견했다. UX라이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만약 내가 사용자라면, 결정적 순간마다 이탈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만큼 크고 작은 오류들이 스토리보드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를 UX라이팅만으로 고쳐보려는 노력은사실 의미 없었다. 기획자의 의도를 이해하나 그저 아쉬움만 한 바가지 마시던 차 다행히도, 스토리보드는 재검수에 들어갔고 난 다시 UX라이팅을 보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무겁다. 프로세스의 흐름과 메시지 가이드가 모호할 때, 제아무리 '해요해요해요'를 쓴들 무엇할까. 친근함은 그저 허울뿐인 '불친절한 서비스'가 될 뿐이었다. 엄지족도 당황할 만큼 희한한(?) 프로세스에서 UX라이터인 나도 방황했을 정도니까.
단언컨대, UI 프로세스와 UX라이팅이 핏하게 맞아떨어지려면 특정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 프로세스가 맥락에 따라 막힘없이 흘러갈 때
■ 적시적소에 필요한 화면이 나올 때
■ 관련 이미지가 콘텐츠와 핏하게 들어맞을 때
프로세스를 처음 이용하는 사용자도 익숙해지기까지 적응기간이 필요한데, 이 학습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좋다. 위 조건이 전제되면 더 짧아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어르신이들이 키오스크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프로세스가낯설고(↔익숙함), 미처 기대하지 못한 상황과 텍스트에 눈앞이 캄캄해져서일 가능성이 크다. 젊은 나도 가끔은 희한한 구성의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할 때가 있으니까. 어쨌든, 어르신들은 키오스크에 친근함을 느끼기 어렵다. 다루기조차 쉽지 않으니 말해 무엇하랴.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어르신께 먼저 다가가는 알바생까지 없다면, 키오스크 환경은 불친절한 경험으로 남을 뿐이다.
토스나 배민 등 전 국민이 애용하는 앱들은 사용성 면에서 익숙하다.(물론 사업을 횡적으로 늘려갈수록 다소 복잡성도 띠지만...) 익숙과 친숙을 합쳐 친숙하다. 일상에서 쓰는 말투도 말투지만, 앱을 사용하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이 없다. 프로세스 상황에 맞는 디자인도 맛깔스럽다.
그리고 하나 더. 개인화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용자에게 수시로 접근한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난 나를 아는 척(?)하는 접근방식이 때때로 반갑다.(ex: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이름을 불러주고, 일과를 묻고, 나의 필요를 알아서 챙기고, 좋은 정보가 있으면 알려주기까지 한다. 메시지를 누르면 쉽고,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프로세스와 프로세스 사이에서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서두에 말한 [해요체를 써서 친근한 정서를 갖게 한다]는 말의 자간은 그렇게 채워진다.
다시, 다시 머스크의 손잡이 마중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팝업 손잡이라는 신기술이 사용자에게 친근함을 주는 매개가 된다면 그건 '마중'이라는 디테일한 상황에 담긴 기분 좋은 '정서' 때문이다. 기능의 의인화랄까. 마중 나갔던, 누군가의 마중을 마주했던 그 당시 감정으로 순식간에 우리를 데려다준다. 한 번쯤은 경험해 본 그 익숙한 감정이은 친근함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프로덕트가 사용자에게 친근한 존재가 된다는 건 혹은 친근함을 준다는 건 익숙함의 다른 표현이고 익숙함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성을 높이는 일종의 필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익숙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다시 읽어 보며 이번 아티클을 마친다.
어떤 일을 여러 번 하여 서투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
어떤 대상을 자주 보거나 겪어서 처음 대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상태에 있다.
눈이 어둡거나 밝은 곳에 적응해 웬만큼 볼 수 있다.
Epilogue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흙같은 어둠으로 가득 찬 숲속에서 야간 전술기동 훈련을 한 적이 있다. 북한군이 되어 야음을 틈타 남한을 침투한 상황이었다. 그날 공교롭게도 북한군 분대장을 맡게 된 나는 맨 앞에서 어둠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손전등이나 핸드폰을 켜면 곳곳에 잠복해 있던 조교들이 가차 없이 페널티를 부여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생각보다 그리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서서히 눈앞에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감각이 되살아났다.
UX라이터로서 가끔 칠흙같은 어둠을 마주하고 한다. 그럴 때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둠을 견뎌내야 했던 찰나의 순간과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의 환희를. 그리고 곧바로 익숙해진 산속을 헤매던 용기를. 익숙함에 대해여 생각하다 보니 여기까지 생각이 떠내려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