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다.
초라한 육신을 옷이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다.
옷의 본래 목적은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피부에 직접 상처가 나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몸에서 나는 더러운 냄새를 흡수해 주기 위함이다.
물론 물질문명이 발달하며 외형적으로 화려해졌지만
기본 기능은 그렇다.
우리의 삶도 옷과 닮았다.
생명이란 옷으로 태어나
아이라는 옷을 입고 자라나고
학생이라는 옷을 입고 공부하며
회사원, 의사,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옷을 입고 살아가며
누구 아빠, 누구 할머니라는 인연의 옷을 입고 살다
죽음이란 옷으로 스러진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우리는 수많은 옷들을 입고 벗는다.
영원히 입고 있을 수 있는 옷은 없다.
옷을 벗지 않고는 빨 수가 없고 빨지 않은 옷에서는
악취가 나고 추해져 본래의 기능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늘 값비싸고 아름다운 옷들만 찾아 나선다.
아이가 아빠 양복을 입거나
거지가 명품을 입거나
남자가 치마를 입고 다니면
우리는 한 번씩 쳐다보고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런 어울리지도 맞지도 가당치도 않은
옷을 입고 다닌다고는 생각지도 못한다.
옷은 옷으로 기능할 때 옷이다.
지금 입은 가족의 옷, 직업의 옷, 사회의 옷 여러 벌의 옷들이
나에게 합당한 옷인지? 그 옷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그 옷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린 옷걸이 인생이다.
옷은 내가 벗거나 아니면 벗겨질 허울일 뿐이다.
때 되면 시들어 흩날리는 꽃잎처럼...
명품 옷 좋아하죠?
저도 좋아해요.
고운 빛깔과 딱 떨어지는 핏에 조화로운 소재로 만들어진
명품 옷은 나를 돗 보이게 하고 한층 멋스러워 보이게 만들어주죠.
그런데 옷이 좋다고 자신이 옷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습다고요?
슬프지만 우리의 이야기예요.
권력자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위임된 힘을 휘두르고
판검사는 영원히 그 법복을 벗지 않을 것처럼 자기 편향된 판단을 하고
재력가는 영원히 그 재물을 가질 수 있을 것처럼 으시되며 살지요.
영원한 가장 행세를 할 것처럼 군림하다 퇴직하고선 이혼당하는 아빠.
세상 잘난 척은 혼자 다하다 남편의 사고로 가정부로 살아가는 엄마.
서울대 나왔다고 으스대다 백수의 지존으로 살아가는 아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늘 이렇게 살지요.
학군 좋은 집에 산다고 현명해지지 않고
비싼 차를 탄다고 빨리 갈 수 없고
좋은 옷을 입는다고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그런 것을 자랑하는 마음은 공허함과 어리석음이 가득하죠.
그런 마음에는 대가가 따라 오죠.
더럽고 추해진 옷을 본인 스스로 벗지 않으면
세상은 강제로 벗겨 버리거든요.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 감옥으로 가는 사람.
법관 자리에서 내려와 명함 돌리고 사는 사람.
가죽 의자에서 내려와 서울역 바닥에 자는 사람.
서울대 나와서 피시방 주인과 친구 되는 사람.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들을 수없이 볼 수 있죠.
그런데도 우린 이런 옷들을 입고 싶어 안달하며 살아가지는 않나요?
좋은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거죠.
하지만 그 옷을 영원히 입을 듯 행세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옷을 입기 위해 안달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훔쳐서는 안 되죠.
아무리 좋은 옷도 때 타고 찢어져 언젠가 버려지는 때가 온답니다.
그 옷 벗고 나면 뭐가 남나요?
그 옷 걸친 옷걸이가 남겠지요.
정작 신경 쓰지도 못한 옷걸이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죠.
그게 나예요.
그 야위어 앙상한 뼈만 남은 그 옷걸이가 나인 거예요.
좋은 옷은 좋은 옷걸이에 걸리는 법이에요.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좋은 옷걸이를 만드는 것이에요.
좋은 옷을 우리가 만들 수는 없어요. 살 수 있는 거죠.
그것은 돈으로 살 수도 있고, 노력으로 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자신의 옷걸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랍니다.
잊지 말아요.
옷은 날개가 아니에요.
옷은 옷이에요.
옷은 옷걸이에 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