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술 한잔하실래요?

by 정희주

"소주 한잔하고 싶다."

통화 말미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한잔 하면 어때? 별일 있겠어? 아빠가 기분이 좋으면 그게 더 좋은 거지."

라고 말해드리며 전화를 끊고는 걱정이 올라오네요.

'그런데 누구와 마실까? 혼자? 더 슬퍼지지 않으실까?'


결혼 전에 아버지와 단둘이 술집에서 맥주를 마셨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그날이 기억이 나네요. 모범생 순둥이였던 오빠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하고 다음날 저녁이 다 돼서야 집에 돌아온 날이었죠. 그날 저녁 우리 집은 발칵 뒤집어졌었어요. 아버지는 아들이어서 그랬는지 걱정하는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받지도 않는 전화통을 붙들고 계셨고 혹시라도 사고가 났을지 모른다면서 병원 응급실을 찾아다니셨죠.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해야 하나 생각하던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오빠가 들어왔어요.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부모님이 따져 물으니 술에 취해서 친구 집에서 잤다고 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오빠는 미안한 기색도 없었고 왜 이리 유난이냐 싶은 듯 살짝 지겹다는 얼굴 표정을 짓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변명도, 미안함도, 억울함도 없는 오빠의 덤덤한 얼굴을 보며 부모에 대한 존경은커녕 의리조차 없는 놈이라며 비난의 말을 퍼붓고는 집 밖으로 나가버리셨죠. 이 사단을 지켜본 엄마는 저렇게 집을 뛰쳐나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신다고 하시며 저에게 아빠를 좀 따라가 보라고 하셨어요. 전 곧바로 따라 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번화가를 한참을 돌아다닌 후에야 아빠와 마주쳤어요. 아빠는 저 멀리서 허탈함 가득한 걸음걸이를 하고 걸어오고 계셨죠. 제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나마 희미하게나마 웃으셨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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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압생트> 1887,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 고흐 <카페>, 1888


아빠는 제게 "술 한잔할래?"라고 하셨죠. 우리는 호프집에 들어가서 생맥주를 한 잔씩 앞에 두었어요. 아빠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제가 지금 기억나는 건 아버지는 실연한 사람의 얼굴이었어요. 일방적인 사랑에 이제 지치신 듯 보였어요. 이러면 알아줄까 저러면 알아줄까 했던 봉사의 시간을 배신당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그 배신을 아시는 듯 크게 원망하지 않으셨다는 것도 느껴졌어요. 사랑 그 후에 날카롭게 찾아오는 씁쓸함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우린 해가 거의 물러날 무렵 노을을 닮은 붉은 얼굴을 하고 집에 들어갔던 일이 생각이 나요.


아버지, 지금은 그 무거운 마음을 누구와 나누고 계시나요?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어떻게 풀고 사시나요?

허탈해진 마음을 어떻게 채우고 사시나요?


일요일 늦은 오후의 흙먼지 뒤로 붉게 내려온 노을을 기억하며 "우리 술 한잔 같이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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