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
최근 언론인을 위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관리, 특히 충격적인 영상으로 인한 트라우마 대처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기자님이 참석했고 2시간으로 예정된 강의가 3시간이 넘어갈 정도로 뜨거운 관심과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중요한 질문을 하신 기자님의 동의를 얻어 대답을 지면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현장에서 겪는 트라우마와 대처에 대한 인식이 보급되는 만큼 사무실 안에서 충격적인 영상을 검토할 때도 트라우마의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Q. 이태원 특보 편집을 위해 출근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무너지지 않으리라 여러 번 다짐한 후 촬영 원본을 봤습니다. 현장에 있던 시민이 촬영한 골목길 참사 영상 중, 한 분이 불과 5분 사이에 생명을 잃어가는 모습을 날것 그대로 확인하게 된 후 그 여자분 얼굴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현재도 그분 얼굴이 아무 연관도 없는 상황에 불쑥 생각이 납니다. 입사 초 아무 예고 없이, 야산에 토막 살인 사체가 모아져 있는, 아주 옅게 블러blur 처리된 촬영 원본을 보게 되었을 때, 선배 한 분이 ‘이런 걸 봐도 덤덤해져야 뉴스를 할 수 있으니, 눈을 피하지 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몇 분간 그 사체 영상을 바라봤을 때보다 이태원 희생자의 얼굴이 더 자주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A. 충격적인 장면이 담긴 영상 원본을 확인하고 작업하시는 기자님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잔혹하고 처참한 영상의 원본을 시민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시청자의 트라우마를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트라우마 장면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트라우마를 겪거나 목격한 후에는 우울, 불안, 불면증과 더불어 재경험, 과각성, 회피, 해리 등 다양한 트라우마 반응을 겪을 수 있습니다. 비정상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 당연히 나타나는 반응이므로 트라우마 반응 자체는 정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집니다. 다만 트라우마 반응이 너무 심하거나 고통이 큰 경우에는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트라우마 장면은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뇌리에 생생하게 새겨져서 잘 잊히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일상생활 중에 트라우마 장면이 불쑥 떠오르는 것을 플래시백flashback이라고 하며, 이것은 재경험 증상의 일종입니다. 때로는 일시적으로, 때로는 장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클수록 재경험이 많이 나타납니다. 과거에 본 처참한 토막 살인 사체보다 최근 이태원 참사의 사망 영상이 플래시백으로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감정이입입니다. 이미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사체의 영상은 기괴하고 처참하지만, 그 피해자의 고통의 표정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표정이 없는 사체보다 나처럼 살아 숨 쉬고 있던 사람이 죽어가는 영상을 보면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고 고통에 공감하여 트라우마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됩니다.
둘째, 실시간성입니다. 이태원 참사의 현장 영상은 영상편집 작업을 하기 바로 전에 트라우마를 겪으며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담긴 만큼 그분의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과 절망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셋째, 현장성입니다. 야산이라는 공간에 비해 이태원은 수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적이 있는,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공간입니다. 나와 연결된 공간, 내가 갈 수도 있는 장소에서 벌어진 그 사건이 우리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현시점에, 나에게 익숙한 장소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영상은 마치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은 감정 반응을 일으켜 이에 압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2차 트라우마(secondary trauma, 2차 외상)라고 합니다. 처참한 장면도 충격적이지만, ‘마치 내가 경험하고 있는 듯한 상황’이 훨씬 깊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기자가 되려면 강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겁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강함은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대처할 때 나옵니다. 트라우마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 신입 기자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어떨까요?
“새로 들어온 기자로군. 앞으로 일을 하면서 트라우마 장면을 볼 수 있어. 그러면 놀라는 것이 당연해. 그때는 꼭 선배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좋아. 그러면 우리가 도와줄게.”
“충격적인 장면을 봤구나. 어때? 괜찮니? 잔혹하고 충격적인 트라우마 영상을 보면 누구나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해.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괜찮아지지만, 만약 힘들다면 꼭 이야기하도록 해. 내가 겪은 이야기도 해줄게. 필요하면 상담을 받는 것도 좋아.”
지금까지는 기자가 트라우마에 노출되는 것이 당연하며, 고통을 겪거나 표현하면 마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듯이 치부했습니다. 그러나,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노출을 최소화하고,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선배들이 나서면 훨씬 빠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선배와 동료의 지지입니다.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해하면, 나와 동료를 구할 수 있습니다.
* 방송기자연합회 발간 '방송기자' 2024년 11,12월호(통권81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