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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승 Nov 10. 2017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재난을 만났을 때

나는 내적 세계에 집중해서 살았을 뿐 외부 세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가 만나는 피분석자들, 연구 활동, 학회 활동이 내 외적 관심의 전부였다. TV도 보지 않아서 출퇴근 길에 차 안에서 가끔 듣는 라디오 방송이 뉴스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고 난 직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홍보기획위원회의 연락망이 가동되며 사태의 긴박함과 심각성을 인지하게 됐다. 


나는 학회에서 발표할 성명서와 보도자료 등을 작성하고 검토하던 중 ‘학회가 할 일을 정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서둘러 여러 선진국의 재난정신건강 분야의 체계와 정보를 수집하여 국내 실정에 맞도록 ‘재난정신의학위원회(가칭) 설치안’이라는 제목의 제안서를 작성하여 회람하였고, 경험이 풍부한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이 보태어져서 대책회의를 통해 대한정신건강재단 산하에 재난정신건강위원회의 설치가 확정되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전문가들이 모여들었고,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열리는 온라인 회의를 통해 지금까지 어느 시대, 어느 기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양의 업무와 계획을 처리해나갔다. 재난정신건강위원들은 모두 마음을 합했고, 서로를 격려하며 지지하고, 또한 서로의 열정과 헌신에 감동했다. 나는 방배동의 아담한 정신분석 클리닉에서 조용히 한 사람, 한 사람을 분석하며 살던 날들을 뒤로하고 가장 뜨거운 용광로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가장 큰 피해지역인 안산시의 통합재난심리지원단에 운영위원으로 나간 날 나는 화랑유원지에 설치된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너무나 화창한 봄날에 무고한 희생자를 생각하니 더욱 커다란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당시 과중한 업무로 인해 소진되기 직전이었던 나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소명의식과 새로운 힘을 경험하게 됐다. 


그 후로 나는 의사를 위한 '재난 이후 개입 모델' 교육 자료를 제작하고, 국정조사 자료를 작성하고, 해외 사례 연구에 참여하고, 재난정신건강위원회의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이듬해에는 메르스 국내 유입 사태로 인해 감염병 재난이 우리나라를 위협했고, 동료들과 함께 감염병에 대한 정신건강지침을 만들어 발표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World Health Organization Western Pacific Regional Office, WHO WPRO)에서 열린 전문가 미팅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세계의 전문가들과 함께 재난정신건강 분야의 정보와 경험을 공유했다. 나는 이 모든 일에 순수한 봉사정신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임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 개인의 가장 심오한 무의식을 탐구하는 분석심리학이 국가적 위기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철저히 자기 자신이 될 것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은 사회로부터 분리되거나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더욱 훌륭히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독립된 개별적 존재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집단의 일원이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양쪽을 가진 전체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회 자료집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세월호 사고 후 100일의 기록"(2014.7.24)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글 _ 정찬승 (융 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http://www.maumdream.com

[현] 마음드림의원 원장,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난정신건강위원,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

[전] 한국분석심리학회 총무이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홍보기획위원, 대한노인정신의학회 평이사

[주요경력]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전문가회의 참가, 국제노년신경정신약물학회 젊은 연구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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