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전시를 본 적이 있고 에밀리와 아델레와의 사랑이야기도 들은 풍문이 있었지만 1시간 이상 먼저 가서 그림들을 둘러보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천정화를 그리면서
철학은 한 번도 사람을 제대로 통찰한 적이 없으니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으며,
법학은 언제나 권력의 테두리 안에서만 작동하니 결국은 힘의 논리에 불과하며,
의학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매우 한계가 분명한 학문이라는 주제의 그림들을 그려넣어 87명의 교수들이 그의 그림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하죠.
결국 사랑도 우정도 삶과 죽음도 다시 '스스로에게 얼마나 솔직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변주의 양상임이 드러납니다.
악당 크라우스는 스스로 세속적으로 살고자 선택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살아가는 반면, 클림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고립이나 타협으로 일그러진 자화상을 마주보지 못하다가 결국엔 자신과의 진실게임에서 때로는 무너지기도 하고, 결연히 자기다움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겠죠.
구스타프 클림트.
그는 화단에서 아르누보의 대가이자 분리파의 선봉으로 평가받는 화가입니다.
자기답게 살았죠.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오늘의 코로나와 같은 스페인독감과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그 댓가는 지불해야 했지만요.
그러나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른 것.
내 속에 있는 나와의 어려운 승부죠...
1미터 거리에서 울고 웃는, 전율하고 분노하는, 조롱하고 좌절하는 배우들의 표정과 육성과 노래를 바라보는 행복에 만족할 줄 모르고,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목에 두르고 스산한 바람을 피해 바벨탑같이 솟은 디타워의 지하로 파고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