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 기간에 차분하게 시간을 들여서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었습니다. 느닷없이 왜 공산당선언이냐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도 던졌는데, 맑스가 자신이 살고 있는 19세기 중엽을, 이전의 봉건주의와는 완전히 다르게 구분되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나아가 그 새로운 세상 너머에 있는 다음 세상, 즉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종식된 세상을 그린 것이 공산당선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중엽 무렵이 되면,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나아가 그 새로운 세상 너머에 있는 다음 세상 역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종식되고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드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맑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정보가치 하락의 역사이다...도을
왕과 귀족, 브루주아지, 평민으로 이어지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볼 것이냐, 왕 한 사람이 독점하던 정보가치가 귀족과 브루주아지, 평민으로 지식이 이전되고 확산됨으로써 정보가치가 하락한 역사로 볼 것이냐에 따라 세상은 매우 다른 색채를 가진 풍경이 될 것입니다.
맑스가 예언한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는 자기 모순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기는커녕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들에게 단순한 실존을 넘어서는 행복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맑스는 노동을 중시했고 노동가치를 절대시했으며,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야 말로 역사발전의 주인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정보는 모두에게 공개되었고, 우리가 인터넷 검색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심지어 무료화되었습니다. 정보가치가 무료화되는 바로 그 시기에 민주주의는 풍부해지고,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며, 실존을 넘어서는 행복은 커졌고, 노동보다는 소비가 더 중요한 미덕으로 대체되는 흐름이 선진국가를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맑스에게 혁명이란 인간의 노동을 소외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그에게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 상대적 박탈감을 증대시키는 소외는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고, 그 소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존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맑스는 생산수단과 그 결과물의 사적소유를 폐지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지만, 오늘날의 자본은 소비 데이터와 그 결과물의 사적 소유야말로 생존의 회로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하여, 오늘날 우리시대의 불안의 근거는 이것입니다.
지식노동자는 '노동이 곧 자본'이라는 선언이고 노동자가 생산수단인 지식을 직접 소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대두되는 인공지능과 로봇은 '자본이 곧 노동'임을 보여줍니다. 이 인공지능과 로봇의 거대하고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증대되는 생산력은 조만간 인간의 일자리를 극적으로 줄이게 될 것이며, '노동'이라는 오래된 신전에 자리잡은 '생산의 주체'라는 인간의 보위를 폐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니나다를까 기업들은 이미 생산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소비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확보하고, 가공하고, 판단하고, 인간의 행동을 권유하고, 촉진하고, 지배함으로써 정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마침표를 찍는 데 인공지능이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인공지능이라는 유령이.
바로 이런 식이지요. 이런 식의 불안과 세상의 종말이나 마지막 세상을 이야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맑스가 예언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저는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되는 SF가 그리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직립보행 이래로 계속되어 온 존재의 불안과 그 불안으로 전도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의 전도된 의식으로서 종교와 똑 같은 역할을 하는 유토피아 혹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는 디스토피아의 이데올로기 논리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은데, 종교는 저 세상의 진리를 수립하거나 폐하는 것이며 이데올로기는 이 세상의 진리를 수립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산수단의 독점이 우리 시대 이전의 불평등을 만들었고, 데이터의 독점이 우리시대 이후의 불평들을 만들며, 어느 때를 살던 인간을 둘러싼 모순과 여러가지 문제들은 다른 모순과 문제들로 그저 낡은 것들을 대체할 뿐이겠지만, 그러한 불안과 혼돈의 시절에도 인간은 언제나 생산이 중요할 때는 생산의 주체였고 소비가 중요할 때는 소비의 주체였습니다. 데이터의 시대에도 설사 일부 기업이나 인공지능이 그 데이터의 독점을 시도하더라도 데이터 그 자체의 생성주체인 인간의 지위는 물론이고 소비의 주체인 인간의 지위만으로도 그 실존이 존중받을 이유는 충분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한 시도가 기본소득을 둘러싼 지속적인 시도라고 저는 봅니다.
백과전서의 출간이래 300년 자본주의는 장시간 노동과 억압과 착취구조를 가시화하는 지식을 인민일반에게 공유하고, 확산함으로써 각성된 인간으로서의 노동관, 소비관, 생활관에 대한 '질문하는 능력'을 새롭게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기계와 인공지능이 답을 쏟아내더라도, '질문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존재하는 한, 지식을 생성하는 '생산적 노동'의 주체로서 남아 있는 한은,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시민 사회의 논리는 무엇인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만으로도 '종의 수호자'로서 우리들 서로의 연대와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