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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야 Oct 30. 2023

이해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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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몹시 화가 난다면, 이는 그를 이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 이유가 없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아버지를 평생 미워한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과 말들, 나이가 들면 나아질까 기대도 해보고, 내가 먼저 다르게 대하면 달라질까 노력을 해 보는 등 수많은 낮밤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해가 되어야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해가 되어야 그를 웃는 낯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버지만 달라지면 온 가족이 행복해질 것 같아서 평생을 그렇게 노력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나 기대와 실망은 비례했다.   어느 날은 내 마음을 알아주시나 싶다가도, 어느 날은 살아온 그대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시는 아버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은 컸고,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는 절망을 사회가 아닌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가족이 불행할 때 나 혼자 행복해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좋은 것도 기쁨보다는 눈물이 앞선다.  이 좋은 것을 나 혼자 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올라온다.  가족이 행복해지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이 엄습하면 탈출구 없는 공간에 갇혀 그 어떤 빛도 볼 수 없다.


구제프의 수도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가 남아 있다면 돌아가라"


비단 아버지뿐이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를 알고 이해하고 더욱 사랑하고 싶어 진다.  우린 모두 한때 누군가의 자녀였기에 부모와 편안한 관계를 이루고 싶은 소망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해하려는 노력은 의미가 없음을 알기를 바란다.  이해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임으로 내가 아버지의 삶을 살아보지 않는다면, 내가 어머니의 슬픔을 경험해보지 않는다면 부모지만 타인인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일은 나 자신의 삶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삶의 지평을 넓히고, 내면의 깊이를 더하며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부모님의 내면과 접촉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똑같진 않지만 어렴풋이 그들의 분노와 슬픔, 나약함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이 그들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이해가 되는 순간들이 모여 어쩌면 그들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부모와의 분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일테다.


사랑은 하지만, 너무나 이해가 안 돼서 미워지고 화가 나는 사람이 있다면  잠시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길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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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충분한 용서가 일어날 때 서로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신앙과 변형, 마이클 아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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