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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Apr 03. 2023

아홉 번 잘해도 한 번 잘 못하면 욕 먹는 이유

부정적 편향








중학생 때 봤던 카툰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네모라는 친구가 동그라미라는 친구에게 모닝콜을 부탁합니다. 동그라미는 매일 아침 전화로 네모의 아침을 깨워줍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어느 날, 동그라미는 깜빡 늦잠을 자서 전화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네모는 너 때문에 늦게 일어나서 하루를 망쳤다고 불같이 화를 냅니다. 매일 아침 모닝콜을 했던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한마디 못할망정 말입니다. 아홉 번을 잘해줘도 한 번 잘못하면 화를 내는 게 인간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하나 생기면, 여태까지 잘한 것들도 의미가 없는 듯이 취급해버리지요.


엘리자베스 루카스라는 심리학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어린아이들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딸기 바구니를 하나씩 주었습니다. 한 집단에는 탐스럽게 생긴 딸기를 골라내라고 하고, 다른 집단에는 상한 딸기를 골라내라고 했지요. 그 뒤에 딸기를 얼마나 골랐는지 묻자 흥미로운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탐스러운 딸기를 고른 아이들은 자기가 고른 것과 비슷한 양을 이야기했는데, 상한 딸기를 고른 아이들은 자기가 고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말한 것입니다. 실제 두 바구니에 담긴 상한 딸기와 탐스러운 딸기의 양은 거의 동일했는데 말이죠. 상한 딸기를 골라낸 아이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훨씬 더 가중치를 두어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성 편향 negativity bias’ 혹은 ‘부정성 효과negativity effect’라고 부르지요. 우리는 아홉 번의 칭찬보다 한 번의 비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한 과목의 점수가 엉망이라면 나머지 과목의 성적이 높아도 시험 전체를 망친 것처럼 좌절합니다. 매일 사랑한다 말하던 애인이 오늘 하루 차갑게 굴면 사랑이 모두 식어버린 것만 같아 슬퍼하지요. 우리는 이렇게 부정적인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합니다. 앞의 실험에서 알 수 있듯 이런 경향성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갖게 되거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마음가짐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본능과 같은 ‘자기보호 기제self-protective mechanism’라는 거죠.


인간의 기본 정서 중에는 슬픔, 혐오, 분노, 두려움 등의 부정적인 정서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왜일까요? ‘부정 정서negative affect’야말로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퀴즈를 내보겠습니다. 맛있게 먹던 샌드위치 속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했습니다. 몇 마리가 나왔을 때 가장 불쾌할까요? 두 마리? 세 마리? 많으면 많을수록? 정답은 반 마리입니다. 당연히 그 곤충의 일부가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 가장 불쾌하고 아찔해지지요.


이 불쾌함으로 앞으로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을 때마다 경계하게 될 겁니다. 혹시 벌레가 들어 있지 않은가 살펴보게 되겠지요.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죠. 샌드위치가 아무리 맛있어 봤자, 바퀴벌레를 같이 먹어야 한다면 안 먹느니만 못하니까요. 만약 부정 정서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바퀴벌레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고 말겠지요. 수많은 세균과 함께 말입니다.


사람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홉 번을 잘해준 사람이 한 번 잘못하면 우리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지요. 내가 당하는 입장이라면 억울하겠지만,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늘 당하는 입장이었을까요? 그 반대의 입장인 경우가 더 많았을 겁니다. 매일같이 밥해주는 엄마에게 오늘 반찬이 짜다며 짜증을 내거나, 잘되던 인터넷이 하루 안 되면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 분노를 표출하지요. 뛰어난 직장 동료라도 치명적인 실수를 딱 한 번이라도 하면 엄청난 비난을 합니다. 매일같이 친절했던 식당직원도 오늘 하루 불친절하다면 컴플레인을 걸고 싶어지고, 저녁 식사를 배달시켰는데 오늘따라 도착이 늦어지면 불평불만 가득한 리뷰를 남기려 듭니다. 매일 약속 시간을 지키던 친구가 한번 약속을 어기면 왜 이렇게 늦었냐며 화를 내기도 하지요. 그들은 모두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것이 많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나의 예민한 모습에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민함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잘한 점에 감사함을 느끼고, 잘못한 점은 안고 가려고 노력해야겠지요. 사회적 동물이니까요. 하지만 아홉 번 나에게 선물을 준 연인이, 술김에 나를 한 번 때렸다면 용서해야 할까요? 아홉 번 안전 운전을 한 사람이 한 번 사고를 냈다면, 사고가 아닌 건가요? 평생을 선하게 살아온 사람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면, 용서받아야 하는 건가요? 평생 진실만을 말하던 사람의 치명적 거짓말은 넘어가 줘야 하는 문제인가요? 한 번의 잘못도 그저 잘 못일 뿐입니다. 그 잘못의 피해자가 된다면 인생이 복잡해집니다. 우리는 그 폭행의 피해자, 사고의 당사자, 거짓말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아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을 경계하게 되는 것 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것만 보려는 태도가 나 자신에게 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들은 쉽게 사랑에 빠집니다. 두세 번 만나고 운명의 상대라 확신하고, 주변 사람의 만류에도 결혼을 약속합니다. 상대방의 나쁜 점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내가 안 본다고 그런 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언젠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 순간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The End of the F***ing World」는 자신을 사이코패스라고 생각하는 제임스와 제멋대로인 문제아 앨리사가 가출을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오랫동안 비어 있는 집을 발견하고 며칠 묵을 계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곧 돌아오게 되지요. 집주인은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앨리사를 겁탈하려고 합니다. 이를 본 제임스는 앨리사를 지키기 위해 집주인을 살해하게 되지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도피 여정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니라는 여자가 제임스와 앨리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보니는 살해된 집주인의 애인으로, 복수를 하기 위해 두 사람을 따라다닌 거였죠. 하지만 사실 보니는 그 남자의 애인이라기보다는 성적인 이용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그 남자는 수많은 여자를 겁탈하고 살해한 잔혹한 살인마였거든요.


앨리사는 보니에게 그 사람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으며, 자기는 정당방위로 그 사람을 죽인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이 변태 살인마라는 사실도 알려주지요. 보니는 인정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을 부정하고,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제임스와 앨리사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집니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의 대사가 나옵니다.


"사랑이 결핍된 사람의 문제는 사랑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있지도 않은 사랑을 보면서 속기도 쉽죠. 하지만 우린 모두 늘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요."


있지도 않은 사랑을 보거나, 존재하지 않는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지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무조건 좋은 점만 보려 한다면, 때때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세상에는 분명 나쁜 사람도 있고, 나쁜 일도 일어나니까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 좋지만, 받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기쁘겠지만, 일어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것은 이렇습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성격을 띠고 있지요. 하지만 부정적인 것은 다릅니다. 치명적인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즉,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강의평가를 확인하는 순간은 대학 강사들에게 한 학기 중 가장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저도 매 학기 말이 되면 학생들이 성적을 기다리는 것만큼 강의평가를 기다립니다. 긴장 반, 기대 반으로 말이죠. 다행히도 학생들은 대부분 좋은 이야기를 남겨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한두 명은 부정적인 말을 쓰곤 하죠.


그 부정적인 코멘트가 저에겐 악플처럼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며칠간은 맘고생을 하지요. 자려고 누웠다가 이불을 발로 차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한숨을 쉽니다. 채점을 하다가도 울컥하고, 밥 먹다가도 가슴에 음식이 얹힌 느낌이 납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저보다 강의평가가 낮은 동료에게 신세 한탄을 하다가 욕을 먹기도 하지요. 좋은 말이 더 많은데 왜 호들갑이냐고요? 그런데 어쩌나요? 부정성 편향이 일어나는걸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저를 지지해준다고 해도, 단 한 명의 부정적 코멘트가 제게는 더 크게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그대로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골똘히 코멘트를 곱씹다 보면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다음에는 그런 코멘트를 받지 않기 위해 문제를 개선합니다. 그 코멘트가 다음 학기 강의를 리뉴얼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이렇듯 부정적인 것에 의미 부여를 하는 일이 저를 더 나은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식탁 위에 놓인 물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물이 반이나 차 있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똑같은 상황이라도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얘기죠.


하지만 저는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물을 더 따를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현재에 만족하면서 말이죠. 그러다 갑자기 단수가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마실 물이 없겠지요. 하지만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도 물을 더 채워놓았겠지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았을 것입니다. 부정적 사고를 통해 경계하고대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분명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본능적으로 부정적 사고를 하는 이유인 거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시선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이해하자는 말이죠. 우리는부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난 나쁜 것만 눈에 보이는 걸까?’ ‘왜 이렇게 부정적인 데만 초점을 맞출까?’ 이런 생각들로 자기 자신을 나무라게 되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우리의 삶은 동화 같지 않고, 우리는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갈 수 없잖아요. 세상을 나쁘게 보는 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그 감정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낙관론자는 비행기를 만들지만, 비관론자는 낙하산을 만든다.” 당신의 부정적인 생각은 하늘을 날 용기를 거둬갈 수도 있지만, 낙하산이라는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부정의 힘을 믿어보세요. 그리고 이용해보세요. 휩쓸리지 않고 다스릴 줄 안다면, 낙하산을 만드는 위대한 발명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본문은 심리서 베스트셀러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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