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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Jun 14. 2023

가족에게 죄책감 갖지 마세요

정서 심리학과 사랑

   


심리학 공부를 하다 보면,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도 모르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마음 깊은 곳에 죄책감을 키운다.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는 아이에게 분유를 줄까 고민하려는 현진을 비난하는 엄마들의 모습이 나온다. 모유를 주지 않으면 아이가 자라며 문제가 생기는 모든 순간에 ‘모유를 주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현진의 상상 속에서는 아이가 자라서 아토피가 생겼을 때, 내성 발톱이 생겼을 때, 심지어 탈모가 왔을 때도 엄마가 모유를 주지 못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미래가 그려진다.     





죄책감은 나의 잘못으로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상처입혔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고통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공감하게 된다. 공감이란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인데, 상대의 고통을 내가 느끼고 심지어 그 원인이 나라고 생각하니 불편함은 배가 된다.


그러나 가족 간에 주고받는 상처에는 보통 의도가 없다. 산후우울증이 심해 감정 조절이 안 되었을 때 아이에게 짜증을 냈던 것,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사주지 못한 것, 일이 너무 고되 배우자에게 함부로 굴었던 것, 철없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무례하게 대했던 것. 다들 돌이켜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옳은 행동은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을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하다. 체력이 없으면 행할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다. 그래서 체력이 없으면 잘못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늘 체력이 부족하다. 아무리 관리하려 해도 한계가 있고 피곤하고 지친다. 어떤 사랑은 돈을 필요로 한다. 가난에 허덕이는 부모를 구원해 주고 싶지만, 지원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죄책감을 품지 말라고 조언하곤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때의 행동은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최고의 선택을 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그 변수는 대부분 통제권을 벗어나 있다. 그러니 내가 가진 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선택을 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잘한 것이다.   

  







죄책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어리석다.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헤엄쳐야 한다. 이 말은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뻔뻔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죄책감을 터는 시도를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족이라지만 세상에서 가장 거리가 먼 사이도 가족이다.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며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말하곤 하지만, 정작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어려움을 합리화하기 위해 ‘꼭 말해야 하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시도해 본다. 그러나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 현실에 마음은 더욱 괴롭다.      


죄책감의 기능은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동기화하는 것이다. 죄책감은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다음 날 맛있는 반찬을 해주거나, 배우자와 크게 다투고 난 뒤 꽃다발을 준비하거나, 괜히 민망한 마음에 옆에 앉아 종알종알 떠들거나. 뭐든 상관없다. 이런 시도는 관계의 긴장을 해소하고 상대의 고통을 누그러트린다. 그러면 나의 마음도 자연히 편해진다.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사과하는 것이다. 운전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멍청한 운전자가 위험천만하게 내 차 앞으로 끼어든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고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클랙슨으로 손을 올리려는 순간 앞 차가 깜빡이를 켠다. 우리의 마음은 거짓말처럼 누그러진다. 화가 가라앉는 순간은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다.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마음은 용서를 준비한다.      


엄마는 왜 나를 이렇게 키웠어? 원망은 이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엄마는 왜 나를 이렇게 키워놓고 바라는 것도 많아? 이렇게 시작된다. 잘못한 것은 모르면서 더 바라는 상대의 염치없음이 미움을 자라게 한다. 아이가 원망을 품는 이유는 사랑받지 못해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마음에 담고 있는데 부모는 모른다는 서운함 때문이다. 가족은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진짜 화나게 하는 것은 잘못한 행동 자체가 아니다. 잘못하고도 그걸 모르는 것 같은 뻔뻔함이다.      


물론 뻔뻔함 역시 오해일 경우가 크다. 우리는 늘 가족을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안도하면 안 된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우리는 독심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사과하자. 상황을 설명하고, 변명이 아닌 상대의 감정을 읽어줘야 한다. 그땐 엄마가 너무 아파서 그랬어, 많이 외로웠지? 그땐 아빠가 너무 바빠서 그랬어, 많이 서운했지? 그땐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속상하셨죠? 이 두 마디면 마음의 벽에 균열이 생긴다.     


처음 생긴 균열은 너무 작아서 티가 나지 않는다. 진심이 전달되지 않은 것처럼 의심된다. 그러나 균열은 조금씩 고요히 퍼져나간다. 상대의 진심을 안 이상 사사로운 행동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밥숟가락에 콩자반 하나 얹어주더라도, 예전 같으면 ‘뭐야 집에나 일찍 들어오지’ 하던 아이의 마음에 균열이 생기면 ‘아빠가 서툴러도 신경 쓰고 있구나’하고 해석하게 된다. 의도하든 아니든 간에 모든 행동에 의미가 부여된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균열이 심해지고 어느 순간 마음의 벽도 허물어진다.     


모든 부정적 감정에는 기능이 있다. 그 기능을 활용하면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숙한다. 그러나 활용하지 못하는 순간 감정에 휩쓸린다. 감정을 통제하지 않으면 감정이 나를 지배한다. 죄책감의 기능은 죄책감을 ‘해결’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잘못을 돌이키려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죄책감은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행동하는 순간 죄책감은 상대의 아픔까지 들쳐엎고 떠나간다.     



* 죄책감과 관련된 책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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