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마이스터의 자아고갈이론
“어디 대학에서 공부하시는데요?”
“야, 왜 그래. 그만해. 알겠다잖아”
“놔봐, 마음공부 하신다잖아. 제가 어지간하면 누가 누군지 다 알거든요. 어디서 공부하시는데요?”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면서 심리학자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소위 ‘마음공부’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가던 중 미소를 띤 여자가 다가왔다. 마음공부를 하자며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날카롭고 공격적으로 시비를 따졌다. 친구들마저 민망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화는 멈출 줄 몰랐다. 이런 일은 여러 번 일어났다. 길에서 실수로 어깨를 부딪친 사람에게 눈에 불을 켜고 화를 내거나, 애정 행각이 심한 연인을 보며 모텔을 가라며 비아냥댔다. 나의 까칠함에 친구들은 불편해했다. “너 요즘 좀 이상해.”
당시 나는 한 대학에 근무하며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교내에 미친놈으로 정평 난 직원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직속 부하직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삼고 괴롭혔다.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 조교도 밥을 먹다 눈물을 훔칠 지경이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와 동료들은 점점 괴팍해졌다. 작은 일도 참지 못하고 쉽게 욕을 뱉었으며 공격적인 행동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도서관에서 고르는 책은 늘 ‘살인’, ‘저주’ ‘협박’과 같은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루는 한 동료가 열심히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데스노트’였다.
성격 파탄자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그런데 더 끔찍했던 것은 나 또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나는 서서히 흑화되고 있었다. 혐오스러운 사람 밑에서 혐오스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내 마음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동료 상담사에게 심리검사를 부탁했다. 검사 결과를 본 그녀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도 결과 해석할 줄 알잖아.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해.” 동료가 자리를 뜨고 한참 동안 결과지를 들여다봤다. 말을 잇지 못했다. 자살 충동, 공격성, 우울 점수 모두 위험 수준을 훌쩍 넘어있었다. 고작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이렇게 무너진다고?
사회 심리학자 바우마이스터Baumeister는 ‘무 실험’이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실험 진행을 위해 모든 참여자는 한 끼 식사를 굶고 와야 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연구진의 잔인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배고픈 그들이 대기하는 실험실 옆에서 초콜릿 쿠키를 굽기 시작한 것이다. 지하철역의 델리만쥬처럼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참여자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한 그룹의 참가자에게는 끝내주는 냄새가 나던 초콜릿을 쿠키를 주었고, 다른 그룹의 참가자에게는 무를 주었다. 그렇다. 그 ‘무’ 말이다. 쿠키 향을 맡으며 씹는 무는 참으로 자린고비였을 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모든 참가자는 퍼즐을 풀어야 했다. 원리상 결코 풀 수 없는 한붓그리기 과제였다. 문제에 답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참가자들은 최선을 다해 과제에 임했고 연구진은 그들이 포기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쟀다. 결과는 선명했다. 초콜릿 쿠키를 먹은 사람들이 무를 먹은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포기하지 않았다.
자아 고갈 이론 ego depletion theory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정해진 수준의 통제력이 있다. 인내심 혹은 의지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힘은 무한히 생성되는 신비로운 능력이 아니다. 한번 쓰면 고갈되는 한정된 자원이다. 하나의 사건에 에너지를 사용하면 다른 사건에 대응할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다시 말해 통제할 힘을 잃는 것이다.
무를 먹은 사람들은 쿠키 냄새를 맡으며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통제력은 소진되었을 것이다. 다음 과제를 위해 비축해놓아야 할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었으므로 풀 수 없는 과제를 붙들고 견딜 수 없었다.
감정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제력으로 이들을 누르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간다. 만약 어떠한 이유로 에너지가 고갈되면 사소한 감정이라도 조절할 수 없게 된다. 나와 직장 동료들은 무를 먹은 사람과 같았다. 직장 내 스트레스를 견뎌내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고 결국 통제력을 잃었다. 그 결과 가까운 친구에게 짜증 내고 모르는 사람에게 공격적으로 대했다.
이기호 작가의 소설 <눈감지 마라>는 지방대를 졸업한 후 취업에 실패해 고군분투하는 정용과 진만의 이야기를 다룬다. 편의점에서 일하던 정용은 서비스직의 스트레스 탓으로 점점 까칠해진다. 그 모습을 보고 함께 살던 진만은 위로랍시고 친절도 병이 된다는 심리학자의 말을 들었다며 조언한다.
“야,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리 하니?”
진만은 정용의 말에 살짝 어깨를 웅크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새끼 교수 맞아? 네가 그 새끼 유튜브에 들어가서 댓글 좀 달아. 똑똑히 알고 지껄이라고.
정용은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말을 이었다.
“너 왜 가난한 사람들이 화를 더 많이 내는 줄 알아? 왜 가난한 사람들이 울컥울컥 화내다가 사고치는 줄 아냐구!”
진만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정용의 말을 듣기만 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야, 몸이 피곤해서……. 몸이 피곤하면 그냥 화가 나는 거라구. 안 피곤한 놈들이나 책상에 앉아서 친절도 병이 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라구!”
<눈감지마라, 이기호, 마음산책, 2022, pp.112-113>.
이 장면을 보고 움찔했다. 심리학자랍시고 이런 말을 지껄인 건 아닌지 나를 돌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피곤하면 자아가 고갈된다. 통제가 어려워진다. 갈수록 까칠한 모습을 보이고, 한순간의 실수가 사고로 연결되기도 한다. 경험해 본 사람만 아는 괴로움이다. 몸이 피곤하면 화가 난다. 아니, 화가 참아지지 않는다.
심리검사 결과를 확인한 그 날,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포기마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그러나 퇴사 일이 정해지자 놀랍게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늘의 구름도 이쁘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도 활기차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시끄럽다고 생각했을 텐데. 오랜 저주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찾아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힘든 사람이었겠지? 그럼 그 사람이 내게 힘든 사람이었던 이유도?
어딜 가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아픔이 너무 크면 내가 받은 상처만큼 아프길 바란다. 그 사람이 불행해지길 바란다. 데스노트를 검색하던 동료의 마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이유 없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왜 그러는지 생각해 보자. 그는 이미 삶의 어느 부분에서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일 것이다. 그래서 통제할 수 없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혔을 것이다.
불행을 바라는 마음을 접어내자. 그는 이미 불행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는 상처는 불행으로 드러난 결과물이다. 안타깝게도 불똥이 나에게 튀어버린 것일 뿐이다. 물론, 불행한 삶을 산다고 그들의 잘못을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를 위해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해하는 건 용서하고 다가가라는 말도 아니고, 품어주고 보듬어주라는 뜻도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을 지키자는 뜻이다. ‘도대체 왜 저래’하고 받는 상처가 100이라면, ‘그럴 수도 있구나’ 했을 때 받는 상처는 10으로 줄어드니까.
원망하고 저주한다고 나아질 것도 없다. 어차피 가서 때릴 것도 아니지 않는가. 미움은 마음만 더럽힐 뿐이다. 그러기엔 우리 인생에 너무 많은 꽃길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원망 대신 이렇게 생각해 보자. 저 사람 견뎌내고 있구나.
* 가을에 출간될 책의 원고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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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작가 마음공방 신고은
강의 및 협업: psychologyclas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