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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Jan 23. 2022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의 모든 것

오늘도 가스라이팅 당했습니다


김수희의 노래 〈애모〉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작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별개로 내가 쪼그라드는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 어쩐지 내가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묘한 불편감을 주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과 함께하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그때 우리는 이 가사를 흥얼거리게 되지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TV를 보다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치킨을 먹으며 볼 게 없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날이었는데요. 평소에는 보지 않던 프로그램이 그날따라 눈에 띄었습니다. 가스라이팅을 테마로 다양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었지요. 관심이 많던 주제인지라 홀리듯 TV 앞에 앉았습니다.


기대와 달리 내용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세뇌하여 범죄에 가담시키는 자극적인 사건이었을 뿐 가스라이팅은 아니었지요. 첫 번째 사건을 본 저는 ‘에이, 저거 가스라이팅 아닌데’ 하며 무심하게 닭 날개를 뜯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가 나오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던 가스라이팅과 다른 이야기가 계속해서 소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치킨은 이미 손에서 내려놓은 지 오래였습니다. 


가스라이팅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도 했던 저는 심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잘못된 정보를 전하고 있었던 걸까? 심장이 요동쳤지요. 내가 알던 내용이 부정당하고, 여태껏 해온 작업이 틀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프로그램 속 사건이 소개될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갔지요. 그러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에야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혼잣말로 이렇게 탄식했지요. “아우 씨, 나 TV 보다가 가스라이팅당할 뻔했네.”


가스라이팅이란 무엇일까요? 상황이나 심리를 조작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핵심은 ‘상황이나 심리를 조작하는 것’과 ‘스스로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장난처럼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요. 사람들은 두 번째 포인트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을 빼먹는 것이지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1944년 발표된 <가스등Gaslight>이라는 영화에서 착안되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모른다면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이 와닿지 않는 용어를 ‘심리적 지배’ 혹은 ‘정신적 지배’로 순화해서 표현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순화된 표현에서 온다고 봅니다. 심리적·정신적 지배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포괄적이어서 강압에 의한 지배, 공포심으로 인한 조장, 반복된 세뇌, 거부할 수 없는 복종까지 포함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용어의 뜻을 모른 채 ‘가스라이팅당했다’는 말을 남발하것입니다.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사람은 상황을 바꾸거나 교묘한 말 한두 마디로 상대방을 조종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반복해서 세뇌하기도 하지요. 이때 심리적 지배의 늪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를 의심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나?’ ‘나, 혹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느라 긴장하고 주눅 들지요.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은 결국 상대를 의존하고 지배당합니다. 관계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가스라이팅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보던 저는 그들이 연출한 이야기(상황 조작)를 듣고 정규 방송에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뻔뻔함(심리 조작)에 판단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잘못된 것이라고 믿기(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불안한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끝까지 시청했지요. 무지한 미디어가 남긴 참담한 가스라이팅 현장 아니었을까요?


판단하지 않고 무턱대고 따라가다 보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 길의 종착지에는 손해 보고 이용당하는 삶이 있지요.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살아가는 삶이 아닌 살아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종국에는 내가 사라지는 삶을 살게 되지요.


가스라이팅은 영화 속 이야기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닙니다. 일상 곳곳에 자리 잡고 있지요. 들으면 놀랄 만한 범죄행위는 물론이고 가장 믿을만 해야 하는 연인 사이에서 빈번히 나타납니다.그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직장 상사나 선후배, 심지어 식당 직원, 의사, 길을 물어보는 아주머니로부터도 가스라이팅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당신도 당했을지 모르고요.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지요. 커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원두 맛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 맛이 그 맛이라 생각하지요. 비슷한 맛인데 뭘 그렇게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하느냐며 제일 싼 커피만 고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커피에 관심이 많아질수록 그 맛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맛없는 커피를 마시면 짜증이 납니다. 믿고 가는 카페와 믿고 거르는 카페가 생기시작하지요. 


가스라이팅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눈에 들어옵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선의인지 위선인지 상대의 의도가 파악됩니다. 믿고 따라야 하는 사람인지 걸러야 하는 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고, 피해야 하는 상황을 알아볼 수 있지요. 허나 커피를 많이 마셔보고 맛을 배우는 것처럼 갈등 상황을 직접 겪는 것은 다소 곤란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남기 때문입니다. 간접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편이 좋지요. 그래서 많은 사례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고 이미 당한 경험에 대해서는 회복하도록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지요. 바로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책을 쓰면서 중점을 두었던 건 최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었습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일단 다 넣어봤… 아니,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 다 다뤄봤어 모드라고나 할까요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수많은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스라이팅과 관련된 다양한 갈등과 연관된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우리 삶에서 스쳐간 관계를 돌아보고 앞으로 함께할 가치에 대해 사유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1장 ‘오늘도 가스라이팅’에서는 가스라이팅의 다양한 상황을 살펴봅니다. 우리의 삶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이는 영화 속 사건부터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상황, 그리고 ‘이것도 가스라이팅이야?’ 싶은 이야기까지 가스라이팅으로 들어가는 길목 언저리에 있는 내용은 모두 담았습니다.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별의별 가스라이팅이 눈에 들어와 피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2장 ‘가스라이팅 레시피’는 ‘도대체 가스라이팅이 뭐야?’라는 질문에 답을 내리는 장입니다. 영화와 소설 속 이야기를 빌려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 현상을 자세히 분석해 보았습니다(인용된 작품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황을 조작하는 건 어떤 건지, 심리는 어떤 식으로 조작되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건 무얼 의미하는지… 우리 삶에 밀접한 이야기들을 통해 가스라이팅의 정의를 하나하나 쪼개서 살펴보았습니다.


3장 ‘치밀하고 친밀한 적 가스라이터’와 4장 ‘준비된 가스라이티’에서는 가스라이팅 관계 속의 사람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가스라이팅을 가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의 특징을 심리학으로 파들어 나와 상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이 장에서는 이런 사람이 가스라이터구나 하고 깨닫고, 가스라이팅에 취약했던 자신을 발견하거나, 심지어 나도 모르게 가스라이팅을 가했던 부끄러운 순간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들여다보아도 대처법을 모르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알면서도 당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래서마지막 5장 ‘굿바이 가스라이팅’에서는 가스라이팅과 가스라이팅을 뿌리로 둔 다양한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리고 그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사유하는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전문 학술 용어도 아니고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된 분야도 아닙니다. 하여 어떤 사람은 별것도 아닌 걸 그럴싸한 용어로 어렵게 말하냐고 폄하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직’ 연구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던 시대에도 이미 지구는 둥근 모양이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가스라이팅은 분명히 실재하는 행위이고,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쉽게 우리 삶을 침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지요. 이때 문제의 원인은 작아진 나일까요? 작게 만든 그일까요?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틀린 건지, 저 사람에 의해 ‘틀림을 당하고’ 있는 건지.


#이토록치밀하고친밀한적에대하여 들어가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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