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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Jan 23. 2022

사랑과 가스라이팅의 구분

우리는 사랑일까?


연애 사연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짜증이 솟구친 적이 있습니다. 뭐, 저런 미친놈이 있나 싶은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나왔거든요. 사연인즉 이랬습니다. 사랑에 빠진 한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내 영혼의 단짝이 되었습니다. 유학파인 두 사람은 취향, 취미, 성격까지 모든 게 완벽히 맞았지만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권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설렘은 오래 가지 못했지요. 두 사람은 서로 변함없이 사랑했지만 새로운 자극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자가 독특한 제안을 합니다 바로 ‘오픈 릴레이션십open relationship’이라는 관계였지요.


오픈 릴레이션십이란 연인 간 상호 합의하에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을 허용하는 관계입니다. 다자간 사랑, 즉 폴리아모리polyamory라고도 하지요. 음, 제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제안이었는데 남자는 그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여자와 계속 만나고 싶지만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는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여자친구 역시 다른 남자를 만나도 된다고 말하지요. 그저 설렘을 위한 다른 만남을 가져보자는 것이었지요. 


남자를 너무나도 사랑한 여자는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직장 동료와 만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여자친구에게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직장 동료(그러니까 새로 만나는 여성)와 있었던 일을 일거수일투족 보고하기 시작하지요. ‘오늘은 그 사람과 술 한잔 할 거야.’ ‘오늘 그 사람과 늦게까지 있고 싶어.’ 여자는 그 보고가 더 고통스럽습니다. 질투에 사로잡혀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지요. 그때마다 남자는 여자를 토닥입니다. 그러지 말고 빨리 다른 남자를 만나보라고 말이지요.


남자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이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활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에게서 설렘을 얻어오면 우리 사이는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실제로 직장 동료를 만나고 온 남자는 여자에게 더욱 잘해주었고 권태로움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여자는 그의 말에 설득당해 결국 새로운 남자를 만나기로 합니다. 술김에 키스도 하지요.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낍니다. 여자는 결국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를 그만하자고, 못 하겠다고 남자친구에게 애원합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끊임없이 여자를 타이르고 설득합니다. 처음이라 힘든 거라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유럽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문화라고, 너도 유학생이라 알지 않느냐고, 심지어 키스했을 때 느낌이 어땠냐는 변태적인 질문까지 던지지요. 괴로워하는 자신과 달리 평온한 마음으로 자신을 달래는 남자를 보고 여자는 혼란에 빠집니다.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걸까? 사연의 끝에 여자는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제가 너무 쿨하지 못한 걸까요?’


세상에, 쿨하지 못하냐고요? 마지막 질문에서 저는 리모컨을 던질 뻔했습니다. 이미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은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분노하고 있었지요. 이 관계는 처음부터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보자고 제안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지요. 오픈 릴레이션십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한 ‘바람’ 정당화였습니다. 그럼에도 여자는 왜 이 관계를 포기하지 못한 걸까요? 나아가, 왜 이 관계가 정상이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심리상담자 로빈 스턴Robin Stern은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상담자를 보며 유사한 결의 피해 사례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교묘히 조종해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유형이었는데요. 문제는 피해자들이 마치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로빈 스턴은 이 현상을 설명할 적절한 용어가 없어, 〈가스등〉이라는 영화 내용에 착안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를 살펴볼까요?


주인공 폴라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모 품에서 자랍니다. 하지만 그 안정도 잠시, 이모도 괴한에 의해 살해되고 말지요. 폴라는 유명 가수였던 이모의 재능을 따라 음악으로 슬픔을 승화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갑니다. 그런 폴라에게 한 줄기 희망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레고리라는 남자였습니다. 그레고리는 폴라를 다정하게 지켜주며 상처를 보듬어줍니다. 한결같은 사랑에 감동한 폴라는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지요.


그레고리는 폴라가 살던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모가 살해당한 장소였지요. 망설이던 폴라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쉽지 않은 결정을 합니다. 하지만 달콤할 줄 알았던 신혼 생활은 엉망이 되어갑니다. 폴라가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물건을 자꾸 숨겨놓는가 하면 선물 받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요. 게다가 방에 가스등이 희미해진다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폐쇄된 다락방에서 발자국 소리가 난다며 불안을 호소합니다. 역시 폴라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던 그 장소에서 사는 것이 무리였던 걸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랬습니다. 유명 가수였던 이모는 값비싼 보석을 소유하고 있었는데요. 이를 욕심낸 도둑이 있었습니다. 도둑은 이모를 살해하고 보석을 훔치려 했지만 숨겨놓은 보석을 찾는 데 실패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조카 폴라에게 접근하지요. 바로 그레고리라는 가짜 이름을 가지고 말입니다. 폴라를 사랑하는 척 결혼하고 그 집으로 들어가 숨겨진 보석을 찾으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아내가 있는 한 집 안을 마음껏 뒤지기란 쉽지 않지요. 결국 폴라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 정신병원에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레고리는 폴라가 스스로 미친 사람이라고 믿게 하기 위해 물건을 일부러 숨겨놓고 폴라가 기억을 못하는 것처럼 몰아세웁니다. 당신 요즘 왜 그러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불안감을 유도하지요. 밤마다 폴라 방의 가스등을 희미하게 조절한 다음 이모의 유품을 모아둔 다락방에 올라갑니다. 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보석을 찾아 헤매지요. 폴라가 가스등이 흐려졌다고, 천장에서 소리가 난다고 말할 때마다 그레고리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과민 반응하지 말라며 다그칩니다 폴라는 남편의 말에 주눅이 들고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폭력 없는 폭력, 정서적 학대를 당한 것입니다. 


로빈 스턴은 영화 속에서 그레고리가 가스등을 조절하고 폴라가 스스로 자신이 미쳤다고 믿게 만드는 것처럼, 상황을 조작해서 피해자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정서적 학대를 ‘가스라이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처럼 가스라이팅에서는 상황을 조작하기도 하고 심지어 마음을 조작하기도 하는데요. 오픈 릴레이션십 연인의 사연이 그렇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비상식적인 관계를 제안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유지하면서 다른 이성을 만나보자는 아이디어였지요.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여자가 바라는 것, 즉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 관계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얌전한 협박이기도 했지요. 외국에서는 일반적인 문화라는 것도 강조하며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더합니다. 


얼핏 듣기로 논리적인 설명과 그의 담담한 말투에 여자는 설득당하고 맙니다. 안온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말투와 표정 속에서 여자는 오히려 불안해하며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습니다. 결국남자가 제안한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보를 탓하기 시작합니다. 이 마음이 지속되면 자신의 생각을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고, 질투와 아픔을 견디면서 그 관계를 유지하려 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정서적 학대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스라이팅 관계에서 이 표현이 딱 들어맞습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그 안에 자신을 잃는 선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 이용하고 있는지 구별하려는 마음보다 지금 내 곁에 그 사람을 두고 싶다는 간절함이 더 크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이용하려고 하지요. 상대의 진심을 이용하는 비겁한 사기꾼입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이 불안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상대의 희생을 통해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게 맞나요?


가스라이팅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토록 치밀하고 친밀한 적에 대하여>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6676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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