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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Jan 27. 2022

언제나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에게

사회비교의 심리학

  


책을 즐겨 읽은 후로부터 출판사 SNS를 유심히 살펴본다. 흥미로운 신간 도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한 출판사의 SNS에 들렸다. 신간 도서를 홍보하는 카드 뉴스가 업로드되어있었다. 한 장 한 장 피드를 넘겨보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문구를 만났다. 반가움의 벌렁은 아니고 당황스러움의 벌렁이었다.     


“자기계발서나 심리학책보다는 인생의 깨달음을 주는 이 책을 보세요.”     


갑자기요? 독서 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계발서를 무시하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그리고 최근에는 심리학 서적도 무시 대상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독자의 주관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출판사가 이렇게 대놓고?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나는 재빨리 프로불편러의 옷을 입고 출판사에 항의 메시지를 보냈다. 굳이 다른 성격의 책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당신들의 홍보 문구 하나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리학 서적은 인생의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을 수도 있어요. 게다가 지난달에도 심리학 서적을 출판했잖아요.


출판사는 사과와 함께 수정하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만 지웠을 뿐 카드 뉴스에는 버젓이 그 문구를 남겨놓았다. 몇 시간 동안 모은 좋아요 수를 차마 포기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카드 뉴스도 내려달라고 다시 한번 항의했지만 나의 메시지는 무참히 씹혀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출판사의 만행을 SNS에 박제하는 것뿐이었고, 출판사의 행태는 수많은 심리학도들의 공분을 샀다.


지나가는 홍보 문구에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생업이 달린 문제다. 열심히 살아내는 사람의 일을 갑자기 비하한다면 당황스럽지 않을 이가 어딨겠는가. 만약 내가 치킨 가게를 차려 열심히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바로 옆집에 한우집이 들어와서는 ‘건강에도 안 좋은 치킨보다는 소고기를 드세요’라고 현수막을 걸어 둔다면 어떻겠는가.


프랑스 대문호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걸작을 공개했다. 그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비문학 책보다는 수준 높은 이 책을 보세요’라고 말할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저 대문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 알릴 것이다. 실력이 있다면 실력 자체로 빛이 나니까. 하지만 자랑할 거리가 없을 땐 어떨까? 자신을 빛나게 해줄 비교 대상을 찾게 마련이다. 저것보단 내가 낫지 않나요? 말할 것이다. 그거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까. 남을 비하하며 자신을 내세운다는 건 그만큼 내세울 것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평생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답을 찾으려는 방법 중에 하나로 사회 비교social comparison를 시도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 사람을 의식하고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상대적 위치를 파악한다. 그리고 자신이 파악한 위치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사회 비교다. 그렇다면 사회 비교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먼저 상향 비교가 있다. 나보다 나은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다. 영화 <해리포터>가 처음 개봉했을 때, 영화를 보고 나온 꽤나 울적해졌다. 이유인즉 헤르미온느가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거울을 보는데 웬 밀가루 반죽 같은 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때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이런 게 상향 비교다. 나보다 우월한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


상향 비교는 두 가지 효과를 가진다. 먼저 나보다 잘난 사람에 동일시하며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동화 효과assimilation effect라고 한다. 이 효과가 영향력을 발휘하면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 어릴 때부터 위인전을 보도록 격려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영웅을 보고 따르며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


요 몇 해,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를 자퇴했다. 갑자기 래퍼가 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쇼미 더 머니>라는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면서 래퍼로 성공한 이들의 삶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플렉스를 외치며 외제 차를 몰고 명품을 휘감은 모습에 청소년들은 열광했다. 감화 감동한 그들은 래퍼의 길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그중 몇몇은 진짜 재능을 발견해 어린 나이서부터 떼돈을 벌기도 했다. 이처럼 한 분야에 성공한 사람은 상향 비교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을 애쓰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모두가 건전한 비교를 하는 건 아니다. 비교 대상이 지나치게 우월할 경우는 닮겠다는 꿈도 꾸지 못한다. 평소엔 제법 만족스러웠던 나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대비 효과contrast effect가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헤르미온느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영화 <아저씨>를 보고 나온 수많은 남성들이 오징어가 되어버린 것처럼, 금수저를 물고 다시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에 파묻히고 우울감에 허우적거린다. 상향 비교는 동화효과의 이점보다 대비 효과의 리스크가 더 크다.      



그래서 다음으로 선택하는 방식이 하향 비교다. 열등한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다. 이 비교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그래도 내가 쟤보다는 낫지 않냐는 생각에 위안받고 싶기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을 보며 감사함을 느끼는가? 나의 첫 번째 저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업》에서 그러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배워왔던 생각. 힘든 사람을 보며 현재의 감사함을 누리자는 가르침. 그 마음 안엔 자기도 모르게 타인을 내리깔고 우월감을 느끼려는 본질이 숨겨져 있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쉽다. 누가 나를 보면서 ‘그래도 쟤보단 나은 삶을 살고 있으니 감사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굴욕적이지 않을까? 나의 불행이 누군가에게 감사의 조건이 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려운 사람은 그저 도와주면 될 뿐이다. 나의 기분이 나아지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건 예의 없고 비겁한 마음이다.     


하향비교를 하는 사람은 주로 자기개념이 위협받은 사람이다. 불안하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찾지 않고서야 도무지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사람이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친구는 뭐랄까 하향비교가 인간으로 환생한 것 같았는데, 매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그것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당장에 만족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돈이 없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구이 통닭을 먹을 때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프라이드 통닭을 먹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기름기 많고 몸에도 안 좋은데 비싸기까지 하지 않느냐며 비하했다. 그렇게 프라이드 치킨을 사랑하는 친구들을 민망하게 만들어야만 속이 후련한 친구였다.


친구는 타인의 부족함을 사냥하듯 찾아냈다. 나 역시 친구의 목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몇 해 전, 나는 신랑의 고향인 지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소식을 들은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와, 정말 축하해.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그런데’서 해도 괜찮겠어? 축하인지 염장인지. 당시 내가 결혼한 예식장은 리모델링을 막 마친 최신식 시설에다가 단독홀이어서 4층짜리 건물을 죄다 누릴 수 있었다. 꽤나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데’라니. 하긴, 그 친구는 내가 대전으로 이사 올 때도 ‘그런데’서 사람이 살 수 있어? 라고 물었던 인물이었다.


돌이켜보면 친구의 인생은 참 기구했다. 여유롭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늘 조급했고 타인의 것에 욕심냈다. 그러다 가질 수 없는 것이 되면 비하했다. 친구는 내가 결혼하기 몇 해 전 결혼을 했고, 그 결혼 생활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폭력적인 남편을 만났고 가난에 허덕였다. 그런 친구에게 나의 결혼식은 불행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자꾸만 누군가의 불행을 찾아내려는 모습이 당시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타인이 힘들어야 비로소 자기가 평범해진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으리라.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자기를 빛내줄 무언가를 찾는다. 그 대상이 자신을 빛나게 해주지 못한다면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인다. 상대를 더 어둡게 만들어 자신을 밝게 만든다. 하지만 회색인 내가 검은 상대 곁에 있다고 흰색이 되는 건 아니다. 회색은 여전히 회색일 뿐이다. 하향비교는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다. 자존감을 높이는 데 기여하지 못한 마음은 다시금 공허함을 초대한다. 더 크고 허무한 슬픔을.     


결국에 정답은 마지막 방식이다. 유사 비교. 나와 유사한, 쉽게 말해 고만고만한 상대와 나를 비교하는 것이다. 끼리끼리 서로를 비교하다 보면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장단점이 정확하게 파악된다. 바로잡을 것은 고치고 잘한 것은 칭찬하게 된다. 현재 나를 존중하면서도 조금씩 나아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글쓰기에 대해 배운 적도 없는 내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이유가 뭘까 고민해본 적이 있다. 그건 비교 대상 때문이 아닐까 하고 답을 내렸다. 나는 존경하는 박연준 시인, 은유 작가의 글과 나의 글을 비교하지 않는다. 왜 나는 저렇게 글을 쓸 수 없을까 좌절하지 않는다. 그들과 나는 체급이 다르니까. 그저 감탄하며 바라볼 뿐이다. 그렇다고 학부생의 리포트를 보며 만족하지도 않는다. 역시 내가 얘들보단 낫지, 하며 마음 놓지 않는다. 나도 그 시기엔 비문이 작렬하는 리포트로 교수의 고개를 절레절레하게 만들었을 테니.  


나의 비교 대상은 딱 나 정도로 글을 쓰고 책을 한두 권을 출간한 사람이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번잡스러운 표현에 당황하고, 멋진 표현에 감탄한다. 그러면서 나의 글을 하나씩 수정해나간다. 자존감을 지키면서도 현실적인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타인과의 비교는 나를 힘겹게 한다. 그들이 나보다 잘 되면 화딱지가 나고, 실패하면 역시 안 되는 건가, 하며 함께 좌절한다. 역시 정말 건강한 비교는 단 하나뿐인가 보다. 바로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것.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크게 차이가 없다. 유사 비교를 하기에 적절하다. 그리고 마음에 타격감이 적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름없다면 본전이다. 적어도 손해 볼 일은 없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야지 기대하며 노력하면 그만이다. 그러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잘했다면 진심을 다해 기뻐할 수 있다. 역시, 나는 발전하는 스타일이야! 스스로를 다독여준다. 혹여나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부족하다면, 그래도 실망할 필요 없다. 어제의 나는 나 아닌가? 결국에 이긴 건 나다. 정신 승리하기에 딱 좋은 비교다.     



나도 인간이기에 여전히 TV 속 연예인이 부럽다. SNS 속 인플루언서가 질투 나고, 베스트 셀러 작가에게 샘이 난다. 그들을 비하하고 내리깔고 단점을 찾으면서 위로받고 싶을 때도 많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오늘도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의 나야, 지금 쓴 글을 잘 수정해주길 바라.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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