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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Feb 10. 2022

누구에게나 미움을 멈추고 싶은 순간이 온다

상처의 점화효과



때는 바야흐로 201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가난한 공시생 남자친구와 이별, 재결합을 반복하던 동생 K가 있었다. K의 크리스마스는 이별 구간에 속해있었다. 외로운 자신을 챙겨줄 기회를 얻겠느냐며 동생이 제안했다. 딱히 할 일도 없는 나는 그래 좋다고 응답했다. 점심을 먹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남기고 한 시간이 지나도 답은 오지 않았다. 그날 밤늦도록, 크리스마스가 끝나도록 동생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놀랍게도 K는 어떠한 변명도 사과도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K에게 돈 많고 잘생긴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와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K가 자신의 SNS에 크리스마스 데이트 사진을 올린 것이다. 네가 누구와 만나 무엇을 하건 나는 관계없지만 문자 하나는 보내줄 수 있지 않았니, 생각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일 년 후 K의 SNS에는 결혼 소식을 알리는 글이 올라왔고 나는 그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K의 결혼식이 지나고 몇 달 뒤, 뜬금없이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언니! 뭐 하고 지내? 보고 싶어. 엉엉.’ 네? 갑자기 이게 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그 아이의 태도에 나는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동생은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는 듯 보였다. 하나 이미 마음이 떠난 나는 건조한 답변만 보낼 수밖에. 대체 뭘까, 이 아이의 마음은.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 마음에는 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취한 행동이 강하게 연합된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그가 보여줬던 행위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마치 생각에 불이 옮겨붙듯이 빠르고 강력하게. 무언가 떠올랐을 때 그와 연합된 기억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 이를 점화priming라고 한다. 여름이 오는 새벽에 첫 키스를 한 사람은 여름 새벽의 향기만 맡아도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새벽 냄새가 키스라는 기억에 불을 붙이고 연합된 기억이 점화되는 것이다.


점화 과정에서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진득하게 연결되어 있을수록 빠르게 불이 붙는다. 두 이미지 사이에 서로 접근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두 이미지가 자주 짝지어질수록, 더 강렬하게 연합될수록 말이다.


중학교 시절, 생일이면 친구들이 프렌치프라이만 만 원어치 쌓아 파티를 열어 줄 정도로 나는 감자를 좋아했다. 아니, 병적으로 사랑했다. 오죽하면 아이디가 ‘일산 감자튀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에 나와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은 감자튀김만 보면 내가 떠오른다고 했다. 신고은은 자주 감자튀김을 먹었고, 자주 감자튀김 이야기를 했으며, 자주 감자튀김 사진을 오려 다이어리에 붙이곤 했으니까. 친구들의 머릿속엔 신고은과 감자튀김이 강력하게 연합되었고, 신고은과 감자튀김의 접근 가능성은 대단히 컸다. 


신고은이 감자튀김을 좋아한다? 이처럼 누군가를 생각했을 때,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큰 문젯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즐거운 추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점화가 무서운 이유는 잊길 바라는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침투하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이별의 기억은 강력히 남아 함께 거닐던 거리를 지날 수 없게 만들고, 함께 먹던 음식을 먹을 수 없게 하고, 함께 듣던 음악을 꺼버리게 만든다. 더는 미워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기억, 이제는 떠올리기 싫은 상처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 때나 불쑥 떠올라 삶은 많은 부분을 회피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억의 연합은 영원하지 않다. 쌍을 이루던 기억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둘 사이의 접근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하나를 떠올려도 다른 하나가 따라오지 않는다. 연예인들은 이 원리를 제법 잘 이용한다. 음주운전, 마약, 폭행 등 범죄에 연루된 연예인들이 쿨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고백하지 않고 자숙하겠단 말과 함께 얼렁뚱땅 자취를 감춘다. 하루에도 여남은 명의 연예인을 (스크린으로) 만나는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숙 중인 연예인을 잊어간다. 그가 저질렀던 범죄는 더욱이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렇게 연예인과 범죄의 연합은 깨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자숙이 끝난 연예인이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때마침 근사한 작품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신선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연합되는 바람에 좋은 사람으로 탈바꿈하기까지도 한다. 그 사람은 더이상 미움받는 사람으로 남지 않는다.     




미움을 멈추고 싶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온다. 그땐 그 사람과 아주 오랜 시간 거리를 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상처와 사람의 연합이 깨어지는 날은 오기 마련이니까. 물론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시간이 지나서 접근 가능성이 낮아진다 한들, 다시 만나게 될 상처를 피할 수 없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으니까. 이별한 연인이 다시 만나도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만 노력하고 용서하는 것은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가 있다.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지키고 싶을 때, 내 인생에 깊숙이 들어오게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만은 안온해지고 싶을 때, 그때는 기억으로부터 자연히 멀어지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부를 묻던 K의 모습은 마치 짧은 자숙을 마치고 컴백한 염치없는 연예인 같았다. K는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알 수 없다. 그때 난 여전히 화가 나 있었고 왜 그랬느냐고 물어볼 만큼 일말의 희망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K가 연락한 그때는 그 아이와 상처 사이에 연합이 깨질 만큼 충분히 시간이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 상처가 생각보다 강력했을지도. ‘술은 먹었지만 음주 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희대의 명언(혹은 망언)이 십몇 년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처럼 말이다.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동생이 그리운 순간이 문득 찾아온다. 그래도 우리 대화 잘 통했었는데…. 그때처럼 가깝게 지내고 싶진 않지만 가벼운 안부 정도는 나누는 사이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마음을 채울 때는 SNS에 들어가 살포시 좋아요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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