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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Feb 18. 2022

[흰곰 효과] 잊으려 할수록 생각이 나는 심리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

    

유독 견디기 힘든 것이 있다. 바로 징그러운 장면 보는 것. 깡패가 칼로 경찰의 배를 찌르려 한다. 이때 경찰은 여지없이 손으로 칼날을 움켜잡는다. 깡패는 힘을 줘 칼을 더 깊게 찌르고 경찰의 손에는 피가 주르륵 흐른다. 자극적인 영화에서 흔히 보는 클리셰다. 나는 이런 유의 장면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한국 느와르 영화는 무조건 거르고 본다.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걸까?


이마 가까운 쪽에 있는 뇌 부위 전두엽에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라는 친구들이 살고 있다. 이 친구들이 하는 일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마치 자신이 경험하는 것마냥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경찰이 칼을 쥐는 장면을 보고 마치 내가 그 칼을 잡은 것처럼 손바닥이 아려오는 건 거울 뉴런의 작품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손바닥이 쓰라리다. 나의 거울 뉴런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때는 2011년, <써니>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유쾌한 여고생의 추억을 다룬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충격에 잠을 이루지 못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그건 잊지 못할 한 장면 때문이었다. 

축제날, 본드 흡입으로 퇴학당한 상미가 나타났다. 여전히 본드에 취한 상미는 눈이 풀린 채 친구들에게 같이 병 음료를 마시자고 권했다. 한때 상미와 친했지만 그녀가 본드를 흡입하며 사이가 멀어진 춘화는 화가 나서 상미를 때리고 만다. 




둘이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병 음료가 깨지고, 상미는 자기 손에 들려 있던 병으로 춘화의 가장 예쁜 친구 수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수지의 볼을 스치고 1초, 2초, 3초 후 볼에는 피가 송골 솔공 맺혔다. 그리고 이내 피범벅이 된 수지는 거울을 보고 기절을 한다.


상상도 못 한 장면에 충격을 받았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수지와 함께 나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볼이 얼얼하다 못해 구역질이 나는 기분에 그 뒤의 이야기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문제는 영화를 본 후였다. 그 장면은 길을 걷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내 마음속으로 침투했다. 깨진 병이 볼을 스치고 피가 맺히는 그 장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를수록 그 장면은 선명히 펼쳐졌다. 제일 심할 때는 잠을 자려 누웠을 때였다. 눈만 감으면 내 볼에 피가 흐르는 느낌이 나고, 볼이 쓰라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악몽 같은 날들은 일주일이 넘도록 지속 되었다. 그 뒤로 누군가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황당하게도 <써니>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마음은 참 아이러니하다. 좋은 생각만 하고 나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안다. 그걸 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나쁜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더 머릿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나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내가 싫다는데 대체 왜?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는 크고 하얀 북극곰이 있다. 광활한 눈밭에 앉아서 빨간 라벨이 붙은 유리병을 들고 벌컥벌컥 콜라를 마시는 맹수. 자 나는 지금부터 이 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나와 함께 도전해보길 바란다. 시작.     





어떤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참 신기하다. 내 평생 흰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는데, 흰곰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짐한 순간부터 흰곰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흰곰을 생각하면 안돼! 하고 마음먹을수록 흰곰에 대한 상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왜일까?


사실 이건 내가 만든 도전이 아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웨그너Daniel Wegner의 실험 장면이다. 웨그너는 사람들이 특정 생각을 거부할수록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실험으로 증명하려 했다. 먼저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절대 흰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만약 흰곰에 대한 생각이 나면 책상 위에 놓인 종을 치도록 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땡! 땡! 땡! 땡! 땡! 종소리의 대향연이었다.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참으로 역설적인 현상 아닐까? 그래서 이를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Ironic process theory라고 부르게 되었다(애칭은 흰곰효과다).     






누구에게나 흰곰이 있다. 떠올리기 싫어도 따라다니는 지긋지긋한 기억. 나의 첫 번째 흰곰은 다섯 살 때 나타났다. 당시 개그맨 이홍렬이 진행하는 <이홍렬 쇼>라는 개그 프로그램이 있었다. 콧구멍이 크기로 유명했던 그는 오백원짜리 동전을 코에 넣는 기이한 개인기를 선보였다.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화면 밑에는 ‘절대 따라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떴다. 


그 장면을 보고, 경고문을 읽으니 너무나도 따라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기 전 엄마 몰래 콧구멍에 넣을 만한 것을 찾아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발견한 것은 끊어진 팔찌에서 나온 가짜 진주였다. 이 진주를 코에 넣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긴장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그 바람에 진주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면이 코로 넘어가는 것처럼 매운 느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경험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남았다. 진주가 코를 찌르는 기분은 너무나도 선명했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다짐하면 할수록 그 느낌은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 코끝이 아려오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의 첫 흰곰이었다.


사람 많은 버스 정류장에서 철퍼덕 넘어져 큰 절을 한 일, 밑도 끝도 없는 말실수를 했던 일, 쉬는 시간에 자다가 나도 모르게 방귀를 뀐 일, 조용한 도서관에서 울린 꼬르륵 소리, 아! 그때 이렇게 되받아쳤어야 했는데, 두고두고 후회되는 싸움 날, 실수, 실패, 배신감. 모두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다. 하지만 잠만 자려고 누우면 그 기억이 찾아온다. 이불을 아무리 세게 차보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곰처럼.     






최근 한 청소년 흡연 방지 캠페인을 보고 기함했다. 광고 속에서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전자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이건 딸기 향, 망고향. 이런 이야기를 하며 연기를 빨아들이는 입이 클로즈업되었다. 그리고 광고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한 학생이 이렇게 외쳤다. “전자 담배도 담배니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no담!” 이 광고 과연 효과가 있을까? 


금연 중인 사람에게 가장 시련을 주는 상황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흡연 장면을 마주할 때다. 눈 앞에 펼쳐진 자욱한 담배 연기를 보자마자 잊고 있던 욕구가 올라온다. 아, 나도 한 대 피우고 싶다. 화면 속 담배는 생각하게 만드는 트리거가 되고, 금연자는 담배 생각을 멈추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노력할수록 담배 생각은 간절해진다. 흰곰이 된 것이다. 


실제로 금연 중인 사람들이 이 광고를 보고 채널을 돌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생각이 난 이상 벗어나기가 힘들어져 적잖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광고는 흡연 독려 캠페인에 더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광고의 한 장면이 촉매제가 된 것이다. 


절제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유혹은 점점 강해지고, 다짐하면 할수록 절제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야 하는 걸까? 다행히 흰곰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딴생각을 하는 것이다. 흰곰을 생각하지 말아야지, 다짐해봤자 소용이 없는 이유는 머릿속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흰곰은 이 비어있는 공간을 틈타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하지만 머릿속에 다른 것이 채워져 있다면 어떨까? 흰곰이 들어올 틈이 없게 된다.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간단하다. 뜬금없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기린을 생각해야지, 하마를 생각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본다. 지금부터 내 머리에는 목이 긴 기린, 엉덩이가 토실한 하마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그들을 바라보느라 흰곰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어떤 대상이 머릿속을 채우는 순간 생각을 전환하기가 어려워진다. 흰곰을 굳이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앞서 나는 흰곰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함께 도전해보자고 제안했다. 나와 함께 흰곰을 떠올리지 말자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흰곰의 세계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 사고 억제를 잘하는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니다. 이미 다른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다음 문단은 무슨 내용이 나올 건데? 이 생각을 하느라 내 제안은 슬쩍 넘어가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흰곰의 늪에 빠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귀신이 흰곰이었다. tvN에서 방영된 <호텔 델루나>라는 드라마를 보면서부터다. 이 드라마는 죽은 사람이 저승으로 가기 전 이승의 원한을 풀기 위해 쉬어가는 호텔이 배경이었다. 그래서인지 피범벅이 된 귀신이 자주 등장했다. 드라마를 보고 샤워를 하는데 귀신이 보일 것만 같은 생각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천장을 보면 눈알 파인 그 얼굴이 보일 것만 같았다. 으으! 떠올리지 말아야지! 할수록 더 구체적으로 상상되었다. 이놈의 흰곰! 



순간 나에게는 몰입감이 더 큰 생각이 필요했다. 아주 스트레스가 되는 생각. 찾아냈다. ‘아, 연말정산 해야 하는데….’ 이 생각과 동시에 귀신은 사라졌다. 생각할래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하지만 짜증이 올라왔다. 연말정산이라니. 이런 방식은 또 다른 어려움을 주니 더 좋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기분 좋아지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제는 자기 전 무서운 생각이 들면 스마트폰을 열고 #댕스타그램,을 검색한다. 그러면 귀여운 털복숭이 강아지들의 엉뚱한 영상이 주르륵 나온다. 귀여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앞으로 키우게 될 강아지까지 기대하게 된다. 머릿속은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 찬다.    

 

누구에게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흰곰이 있다. 하지만 흰곰은 머릿속에서 내쫓으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곳에 닻을 내린다. 다른 것으로 채우자. 좋아하는 생각으로 가득 채우자! 흰곰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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