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공방 Mar 21. 2022

실수를 덮고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을 때 이 글을 보세요

심리학자가 만난 <소년심판>의 한 장면


학기가 끝나는 날이었다. 성적을 입력하고 제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완도항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두 시간 안에 출발해야 했다. 그런데 한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성적 확인을 부탁한다고. 이름을 보니 그 학생의 한 학기 동안 행보가 여실히 그려졌다. 의심 없이 A+를 받을 학생이었다. 뭘 묻고 싶은 걸까. 확인해 보니 C+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이 공시되어 있었다.  

   

입력된 성적을 톺아보니 치명적인 실수가 발견되었다. 수강생 중에 외국인 학생이 있었고 나의 성적표에는 그 친구가 성, 이름순으로, 성적 입력 플랫폼에는 이름, 성순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오름차순으로 정렬해 성적을 올린다는 것이 그만 그 사달을 낸 것이다.     


잘못된 성적을 받은 학생은 총 여덟 명이었다. 성실했던 네 명은 실력에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고, 반대로 어떤 네 명은 그들의 보상을 대신 받았다. 바로잡아야 했지만 막막했다. 성적이 올라갈 아이들이야 고마워할 테지만, 실수를 인정한다는 사실은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성적이 떨어질 애들의 반응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민원이 들어오겠지, 학과 대대로 멍청한 강사라고 비난을 받겠지.     


다행인 건지 그날은 성적 공시의 마지막 날이었고,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은 없었다. 이 친구의 성적만 대충 수정하고 나만 조용히 넘어가면 끝날 일이었다.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제주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냥 넘어가. 아무도 모르잖아. 얘들도 이미 다 인정한 상황이잖아. 그냥 떠나서 놀자. 복잡하게 일 처리하지 말자고. 한 명만, 딱 한 명만 조용히 처리하자고.     


얼마 전 우연히 시청한 <소년 심판>이라는 드라마가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드라마에서는 촉법소년들의 교화를 위해 소년법 개정을 개정하려 노력하는 부장판사가 등장한다. 처벌이 아닌 교화를 위한, 진짜 법을 만들겠다는 그의 간절함은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법복을 벗고 정치계에 입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부장판사는 판사 인생 마지막 사건을 맡게 된다. 데카르트. 돈을 받고 시험지를 유출해 주는 고등학교의 불법 모임. 그리고 그 학교는 그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이기도 했다. 데카르트의 제안을 당당히 거절했던 그로서는 판사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더없이 의미 있는 재판이었다.     


사건을 담당하기로 수락하고 사직서를 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차에 탄 순간, 아들로부터 전화가 온다. 아들의 목소리는 급박했다. 그리고 울부짖고 있었다. 잠깐 가입했다가 바로 탈퇴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데카르트, 어떻게 하느냐고. 아들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아버지의 반대에 몰래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사실을 안 판사는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정계 진출을 포기하기로 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뜯어말린다. 단순한 양심고백이 불러올 끔찍한 파장을 선연히 그려준다. 한 가정의 파국을, 그가 쌓아온 삶을 더럽힐 얼룩을. 결국 판사는 자신의 잘못, 아니 자기도 모르게 생긴 인생의 오점을 덮기로 한다.     


잘못을 숨기려는 사람은 어색하기 마련이다. 불합리한 결정에 스스로 당황하고, 이유 없이 분노하며 예민하게 반응한다. 양심은 죄책감을 숨기려 할수록 교묘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드라마의 주인공 심은석 판사는 그의 어색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사건에 휘말려있음을 알고 있다고, 바로잡으라고 몰아세운다.     


부장판사는 자그마치 오 년을 준비해온 일이 눈앞에 있다고.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망치지 말라고 역정스레 분노한다. 그때 심 판사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서는 안 되는 거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사명이었던 한 사람이 자신이 연루된 잘못에는 어떻게 그렇게 관대해질 수 있는 것일까? 한 번 정도는 눈 감아 달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일까? 윤리, 도덕, 규칙. 너무나도 당연한 선이 왜 나의 일이 되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될까? 해석수준이론은 이에 답을 내린다.     


사람은 같은 현상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카페에 가서 비싼 음료를 마시는 것을 나는 행복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고작 이만큼의 돈으로 달콤한 미각적 욕구와 따뜻한 정서적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고작 커피에 우유, 시럽을 섞은 것에 엄청난 돈을 낸다고 비웃는다. 그에게 이 장면은 돈 지랄로 비추어질 뿐이다. 왜일까? 어떤 이에게는 세상이 구체적 행위로 보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추상적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상황이 있고, 가깝게 감각되는 상황도 있다. 일 년 후의 나는 멀지만 두 시간 뒤의 나는 가깝다. 이 거리감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바꾼다.      


가까운 장면은 구체적이고 선명하다. 그 뚜렷함이 다가올 일을 성가시게 볼지, 아니면 환대할 것인지 가른다. 당장 내일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는 유튜브 시청을 멈추고 잠들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 자지 않았을 때 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머나먼 장면은 추상적으로 비추어진다. 의미가 행위를 앞선다. 일 년 뒤 휴가지에서 지금보다 날씬할 자신을 기대하지만 그렇다고 다이어트를 위해 당장에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때 되면 다 해결되어 있겠지, 생각할 뿐이다. 까마득한 미래에 대해 상상할 때 우리는 과정은 뛰어넘는다. 그저 바라는 막연한 결과만 그리며 만족할 뿐이다.     


부정을 저질렀을 때도 마찬가지다. 거짓말에 들켰을 때, 잘못된 서류를 넘겼을 때, 남의 물건을 실수로 깨부쉈을 때, 하기로 한 일을 깜빡했을 때, 한순간의 통제력 상실로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누구에게나 덮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것인가?     


판단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순간, 모든 사건은 가까워진다. 잘못을 바로잡을 때 짊어지고 갈 성가신 일들이 선명히 그려진다.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음에도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들이 저마다 할 말 있다고 손을 든다. 사정에 귀를 기울이면 그 말이 다 맞다. 내 잘못에 서사를 부여하고 명분을 주고 싶다. 그래서 지금 당장만 그 성가심에 눈 감으면 아무 일도 없던 일처럼 안온한 미래를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미래는 켜켜이 쌓인 현재의 덩어리다. 지금 눈 감는 것이 미래가 된다고 거짓말처럼 사라지지는 않는다.  

   

제주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성적을 재공시할 것인가? 다행히 마음속 전쟁에는 선이 승리했다. 시험지와 노트북을 바리바리 싸 짊어진 채 제주로 떠났다. 숙소에 도착해서 자료를 정리하고 내일 아침 일어나는 대로 학교에 연락하겠다고 결심했다. 공시 기간에 끝나서 수정이 불가하다면 어쩌지, 다음 학기 강의는 없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으면 어쩌지, 별별 생각에 잠을 설쳤다. 하지만 학교 측 반응은 생각보다 단조로웠고 심지어 다정했다. 어머, 교수님! 제가 20분 동안 열어 드릴게요. 수정하고 연락 주세요. 시스템을 다시 닫아야 하거든요.     


학생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성적이 오른 학생들은 고맙다며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고, 성적에 떨어진 학생들은 아쉽지만 알겠다고 할 뿐이었다. 어쩐지 성적이 너무 잘 나와서 이상했다며 너스레를 떤 학생도, 거듭 미안하다는 내 사과에 되려 위로를 건네는 학생도 있었다. 심지어 시험을 못 봐서 죄송하다는 아이까지도. 물론, 뒤에서야 내 욕을 했을 테지만 예상만큼의 파국은 아니었다.     


남의 잘못을 들여다볼 때는 명확히 보이는 답이 내 일이 될 때는 그렇지 않다. 인정하는 순간 겪어야 하는 구체적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사는 생각만큼 아프지 않은 법이다. 벌도 마찬가지. 잘못을 바로잡는 순간은 생각처럼 치명적이지 않다. 예상만큼 나를 망가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못 본 채 넘어간 채 맞게 될 미래야말로 상상보다 더 끔찍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눈 한번 딱 감으면 장밋빛 미래만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날까 봐 불안감에 떨며 살아야 한다.      


<소년 심판> 마지막 회에 부장판사가 다시 등장한다.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판사와 정계 진출을 모두 포기한 채 초라한 뒷모습으로 떠났던 그는 마치 피부과 관리라도 받은 듯 환한 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왜인지 가슴에는 무궁화 배지도 달려있다. 무너질 줄만 알았던 선택은 그에게도 옳게 작용했고, 두려워했던 만큼 그를 망가트리지 않았다. 잃을까 봐 걱정했던 것도 여전히 손에 쥐고 있으면서 말이다. 만약 그때 그의 마음속에 악이 선을 이겼다면 지금은 회색빛 얼굴로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드라마 같은 일은 분명 우리 삶에도 찾아온다.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 나는 이후로도 높은 강의 평가를 받았고, 새로운 꿈이 생겨 발걸음을 옮기기 전까지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잃을 것 같은 건 여전히 곁에 남았고 대단히 날 괴롭힐 줄 알았던 대형 사건은 이내 잊히는 사소한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당장 눈앞에 그려지는 걱정이 나를 그른 길로 인도할 때가 있다. 나에게 차악이 되는 선택을 세상에 최선이 되는 선택이라고 포장하고, 옳고 그름을 바로잡는 지혜를 놓쳐버린다. 하지만 당장의 시련은 생각보다 무겁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은 시련을 피하려는 비겁함의 열매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통은 해석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