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의 사생활
심리상담사가 제일 멋있으니까!
1.
아주 어릴 때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내 또래 여자애들은 ‘간호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고 싶다’고 정답처럼 말했고 나 역시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뻥이었다. 간호사가 제일 멋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이가 감기 걸려 병원에 가면 무조건 주사를 맞았다. 너무 가벼운 증상이라 주사 처방을 하지 않아 아이들이 안도할 때, 엄마들은 섭섭한 목소리로 ‘왜 주사 안 주세요? 얘 주사 한 방 놔 주세요’하는 것이다. 기어이 주사를 받아 내야 뭔가 적절한 치료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시절이다. 혹은 엄마 말을 안 들어 기어이 감기에 걸린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벌주는 의도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죄인처럼 바지를 한 뼘 내리고 처분을 기다리는 내 얼굴과 대조되는 간호사의 얼굴에는 무표정, 무흥미, 무의욕, 지루함, 그리고 약간의 동정심이 있었다. 그녀는 절도 있는 손놀림으로 늘 같은 순서로 척척 망설임 없이 주사를 준비했다. 그 과정은 절대 지체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늘 똑같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엉덩이를 때리는 강도와 알콜솜을 문지르는 범위, 주사가 들어가는 느낌 또한 모두 매번 똑같다.
‘됐다’라는 그녀의 선언이 이 과정의 맨 마지막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확실히 알고, 늘 일관적인 간호사를 나는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했다.
2.
초등학교 때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가가 멋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정말 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 독자였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우리 집은 TV가 없었고(가난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교육신념 때문에) 책이 가득했다. 게다가 책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보시는 연구서적들이었으니 집에 재미있는 것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 중에 가장 재미없어 보이는 것은 가구처럼 꽂혀있는 갈색 양장본 전집이었다.
엄청나게 덥고 지루했던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너무도 덥고 지루했던 나머지 그 날에는 그 덥고 지루해 보이는 갈색 전집에까지 눈길이 갔다.
‘이 책들은 정체가 뭐야. 대체 제목이 어디 쓰여있는 거냐’
책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고 책 등 아랫부분에 아주 작은 금박 글씨로 수수께끼같은 제목들이 있는 것을 겨우 발견했다.
<돈끼호떼/ 쎄르반떼스>
<백치/ 도스또예프스끼>
<안나 까레리나/ 똘스또이>
<멕베스/ 셰익스피어>
제목을 봐도 이게 뭔 소리인지, 사람 이름인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책을 펼쳐보니 그림 하나 없이 한 쪽에 두 단씩 작은 글씨가 빼곡했다.
‘좋았어. 오늘은 이게 뭔지 한번 알아내 봐야지.’
하고 심드렁하게 결심한 날로부터 나는 몇달간 그 전집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지금까지 읽던 고운 어린이 책들에 나는 속고 있었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마법과 진실의 이야기가 그 안에 있었다.
3.
심리상담사는 이 둘을 합쳐 놓은 직업이다.
간호사로부터 배운 것은 숙달된 기술과 전문성, 감정에 솔직하되, 그 감정이 행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자기 통제력, 일관적인 태도가 부여한 권위이다.
상담사는 내담자와 상담사 자신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 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이 아프게 느껴질 때 있지만 그것은 해가 되는 아픔이 아니다. 아픈 곳을 가리킨다고 더 아파지는 것이 아니고 외면한다고 저절로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됐습니다.' '그건 정말 잘 하셨어요.'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에도 그 간호사처럼 권위가 있을까.
자기 삶의 이야기를 쓰다가 막힌 작가들이 상담소를 찾아온다. 주인공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주변 환경이 너무 가혹해졌거나 두려움이 너무 커서 얼어붙거나 날뛰거나 하는 문제가 일어나면 이야기가 멈추고 삶이 중단된다.
나는 적극적인 독자이다. 적극적인 독자는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한 날카롭게 비평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작가가 보지 못하는 진실, 거두지 못한 복선, 잊어버린 떡밥, 맥거핀, 이야기의 진짜 주제를 발견하고 알려준다.
오늘 아침에 상담소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아, 심리상담사는 정말 멋있는 직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