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 49화. 엄마에게 칼을 드는 아이.
상담자 입장에선 미디어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내가 상담실에서 이야기하는 몇마디보다 미디어에서 사람의 마음을, 사회의 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했는가가 더 파급력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미디어의 힘에 편승해 더 쉽게 노를 젓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미디어를 거슬러 가기 위해 애써야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새끼>는 내 입장에선 노젓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에 가깝다. 실제로 내담자들이 많이 보기도 하고, 거기서 자극을 받은 내용이 상담실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발전되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빼먹지 않고 에피소드를 챙겨보는 편이다.
오은영 박사님을 비롯한 패널이나 제작진들이 방송의 재미나 자극을 위해 금쪽이나 가족들을 희생시키려고 하지 않는 섬세함들이 곳곳에 보여 보는 입장에서 마음이 비교적 편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이라는 한계와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이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시켜 다시 그 이야기를 인터넷이라는 엄청난 파급력을 빌려 재생산 시키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지점이다.
그러다보니 매 회차 금쪽같은 내 새끼가 방영되고 나면 레전드니, 탑쓰리니 이것저것 말 보태는 편들이 생기고, 오늘 내가 이야기하려는 회차도 그 레전드로 꼽히는(어떤 의미의 레전드인지 모르겠지만...) 에피소드이다. 바로 49화. 엄마에 대한 분노로 각종 자극적인 싸인을 보였던, 그 아이이다.
칼부림. 오줌 싸기. 폭행. 차라리 희망의 싸인
49화에 등장하는 금쪽이에게는 확실히 과한 증상들이 있다. 특히 기사 뽑기 딱 좋은 싸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상담자 입장에선, 이번 에피가 과한 건 맞지만, 본질 자체는 다른 금쪽이들과, 나아가 우리 모두의 어려움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49화의 금쪽이가 그전의 애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데, 칼이나 욕, 오줌, 폭행 등 자극적인 싸인을 많이 보였고, 거기에 여러가지 엄마의 상황이 겹쳐져서 '쟨 진짜 역대급 악마. 갱생 불가' 이렇게 프레임이 짜인 것 같다.
근데 상담자 입장에서는 차라리 확연히 수면으로 드러난 어려움과 증상이 한편으로 반갑고 치료의 싸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주로 성인 상담을 하는데, 상담에서 가~장 어려운 케이스는 본인이 불편하다고 느낄만한 불편한 증상이 없는 경우. 그래서 검사와 면담에서 아, 심각한데? 싶은데 일단 내담자 스스로가 불편을 느끼지 못하거나 드러나는 증상이 없으면 내담자 본인과 주변에서 치료 의지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차라리 누가 봐도 GG쳐서 전문가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 치료적 입장에선 희망이 보이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왜' 아픈지 이해하는 게 때론 의미 없을 때가 있다. 효율도 떨어지고. 하지만 이번 회차의 경우에는 '왜'라는 질문이 필요했다. 오은영 박사님이 너무나 잘 설명해 주셨기에 난 거기에 몇 가지만 덧붙여서 말해보고 싶다.
편도체의 손상. 모든 것을 공포의 눈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기능들, 그러니까 우선순위를 정하고, 결과를 예측하고, 그를 위해 조직화하고 당장의 이익이나 즐거움을 미룰 수 있는 이런 고급 기능들은 모두 전두엽의 일이다. 일반적인 뇌의 발달을 생각할 때 청소년기 쯤에는 전두엽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남자는 평균 29세 경에 전두엽 완성이라고 본다. 그러니 청소년기 뇌는 포유류랑 비슷하다고 본다. 그니까 원숭이가 말하고 뛰어다닌다고 보면 되는...
직접 만나지 않은 내담자에 대해 말하고 심지어 이유를 예측하는 것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또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방송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조심히 생각해보면, 아이가 5살에 부모의 이혼이 있었다면 아마 그전에도 불화와 갈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장 편도체가 예민한 36개월까지 아마 큰 공포와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편도는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우리로 하여금 자라 보고 놀란 후 솥뚜껑 보고도 자지러지게 하는 애가 바로 편도다. 과일반화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불안과 공포증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게다가 편도가 좀 더 예민한지 덜 활발한지는 타고난 부분도 어느 정도 있는데 아마 금쪽이는 조금 더 예민한 편도를 가지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자극에 예민한 아이가 하필이면 편도체가 단단해지는 그 시기에 매일매일 쓰나미를 만난 것 같다. 단단해질만 하면 엎어지는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다보면 편도체는 결국 모든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게 그 무엇이라 해도 말이다.
불안의 본질. 닻 내리지 못한 배의 아픔.
방송에서 박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의 증상의 본질은 불안이다. 우리가 보통 불안이라고 하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말 못 하고 벌벌 떠는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생각보다 불안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된다.그래서 불안의 발현된 모습이 아니라 그 본질에 집중하는 편이 더 정확한 개입이다.
불안의 밑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취약한 내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은 줄곧 수치심에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너무 심한 풍랑 한가운데 있는 부서지기 일보 직전인 조각배인데 아무도 나의 닻을 받아주지 못하는 거다. 세상은 너무 거칠고 나는 너무 취약하다.
게다가 금쪽이는 편도체 취약성도 예측되고, (즉 불안과 공포에 대한 면역성이 낮음)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가 자기만 바라보고 잡아줘도 모자란데 자녀가 셋이고 (심지어 얘는 중간 아이이다. 건강한 가정에서도 중간 아이가 느끼는 열등감이 있다) 이게 얘 불안을 더더더 자극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불안의 밑에는 분노가 있다. 어떤 분노냐.
왜 너는 날 못 잡아줘? 왜 날 보호 못해줘?
누구든 나를 좀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불안한 사람일수록 가까운 애착 대상에게 그걸 강렬히 원한다. 그리고 그 애착 대상을 이상화시킨다. 이건 어른에게도 많이 나타난다.(이래서 팬이 안티 되면 무섭...)
사실 10살이면 아직도 부모가 대단해 보이지만, 동시에 부모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혼란 겪을 시기, 바로 사춘기의 초입이다. (사춘기= 부모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난 여전히 부모가 필요하다는 대 환장 파티).
그런데 금쪽이는 여전히 엄마가 중요하다. 아무리 내가 난장을 쳐도 이상적이고 전능한 대상인 엄마가 나를 흔들리지 않고 잡아줘야 하는데, 현실의 엄마는 눈으로는 날 두려워하고 신체적으로는 날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다. (아이가 잡혀있을 때 계속 팔이 아프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엄살이 아니라 정말 불편함을 드러냈던 것) 이게 불안이 높은 아이의 분노를 자꾸 건드리는 거다.
내가 나 하나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전능한 유일한 대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엄마조차 나를 충분히 담아내지(containing) 못한다. 이건 단순한 실망을 넘어서 존재와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래서 얘가 '이게 날 키우는 거야? 죽이는 거지?'라고 말했던 게 사실 이 관계를 관통하는 말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애착이란, 결국 든든한 탐색 기지
'애착'이라는 게 다른게 아니라 결국 내가 안전하다고 느껴서 탐색하게 도와주는 안전 기지이다. 탐색이란 내가 누구인가부터 시작해서 외부 탐색까지 모두를 의미하며 평생 일어난다. 10살이면 더더욱 활발한 외부 탐색의 시기인데 금쪽이는 일단 자기 안의 폭풍을 다루기도 벅차기 때문에 외부 탐색은 언감생심이 된다. 아마 등교가 어려운 것이 이것에 연장선상이 아닐까 싶다.
이런 탐색을 하려면 든든한 대상이 필요한데, 여기서 얘가 남자아이인 게 또 중요한 요인이다. 이 시기에는 아무래도 정체성 형성을 위해 동성의 어른이 롤 모델이 된다. 꼭 아빠가 아니어도 형, 삼촌, 선생님 등등 다 좋다. 근데 일단 이 경우에 아빠가 항상 함께 하지 않고 손윗 형제는 여자고. 이런 게 이 아이에게 모두 리스크가 된 거다.
약함이 악함이 되지 않는 힘, 사랑
방송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쟨 글렀다, 쟨 이제 더 크면 더 심해진다라며 아이를 악마화 시키는 것을 본다.사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방송은 결국 긴 과정 중에 일부만을, 그것도 그 에피소드의 주제를 중심으로 편집된 영상을 보여줄수 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드라마틱한 변화나 성장이 안 보일수도 있다. 혹자들은 아이 자체가 이미 글렀는데 뭘 자꾸 엄마에게 요구하냐고 말한다. 이러저러한 치료의 한계나 아이의 한계, 부모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냥 이건 방송의 한계이다. 아니, 우리가 남의 삶을 보는 것의 한계이다.
이 긴 글의 진심은, 우리가 조금만 남의 약함에, 그리고 나아가 스스로의 약함에 조금만 더 관대하면 좋겠다는 마음인 것 같다. 우리가 남의 약함에 필요 이상의 비난을 할 땐, 대부분 거기엔 소화되지 못한 나의 약함이 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소화되지 않은 비난까지 이자 쳐서 상대를 비난하고, 악마로 만든다.
개인을 악마 혹은 마녀로 만드는 것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악함에서 약함을 보는 건 너무나 어렵다.
약함이 악함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그 길목을 지키는 건
결국 좋은 시스템과 우리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